본문 바로가기

=====지난 시리즈=====/Noribang의 석간 경향

34. 詩 - 가을날의 한 걸음

                                         
                                                             이상우 -  비창 (1994)



한때는 삶에서 피어나는 향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향수를 언제 잃었는지도 까마득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장을 열면서 
그 잔향은 짙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가끔씩... 마음이 허전할 때면
어릴 적의 손자국이 여전한,
이제는 새끼손가락만해진 연필 한 자루 들고
가을날의 석양을 그려보겠다고 나서 봅니다.


노을빛은 그래도 옅은 사랑을 
연필 잡은 손이 기억하도록 남겨놓았건만
그 때의 마음은 저도 알지 못하는 사이
인사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 마음의 빈 자리에는
그저 오래된 풍경만을 손끝에 남겨두는
쓸쓸한 자아만을 남긴 삶이 들어와
하릴없이 흑백의 노을빛처럼 종이를 감싸오며
절망과 희망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산 어디선가 낮잠서 깨어나
어슷하게 마을을 흘러온 시냇물.....
작지만 꾸준한 줄기를 이루어
서녘의 어디로인가 흘러가는 길을 따라
잠시나마 물처럼 흘러가 봅니다.


잠시 바람을 맞으며 갈대 흔들리는 소리를 듣다가...
어깨에 걸치고 나온 외투의 주머니에
저녁 바람으로 차가워진 손을 넣으니
사탕 몇 개가 장난꾸러기처럼 들어옵니다.


아마 사탕을 좋아하는 어린 아들이
늦가을 산책을 좋아하는 아빠를 생각하고 
이 철 내내 입고 다녔던 거친 옷을,
아니 마음까지도 부드럽게 만들어주고 싶었나 봅니다.


달콤한 감귤맛 사탕을 하나 입에 넣습니다.
또 몇 발자국을 그렇게 걷다 보니,
이제 저 멀리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불빛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늘 저녁에는 아빠가 손수 그린 그림을 보여 주며
광에 넣어둔 고구마라도 구워 주어야겠습니다.


그리고, 구석의 베개를 찾아
아들이랑 이불 덮고 누워
엄마랑 처음 만났던 시절 이야기라도 해 보렵니다.


온전히 향기로운 시절을 어느새 떠나보내고,
지금은 비록 찬바람에 사정이 어렵다고 해도,
마음만은 네가 넣어준 사탕을 닮을 것이라고,
그리고 가을날의 걸음을 기억하리라 생각하면서...



@Noribang 윤동주는 <쉽게 쓰여진 시>를 썼지만, 실상 그건 어렵게 쓰여진 시라는 것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