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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EBS 공룡' 수능 사교육·공교육 다 삼켰다

“‘듄아일체’ 할 때까지 무한반복하는 수밖에 없어요.” “무조건 ‘닥듄공’ 하는 거예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30일 앞둔 지난 9일 서울의 한 고교 3학년 교실에서 학생들이 나눈 대화다.


 
요즘 고3생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듄’은 EBS를 한글 자판으로 입력할 때 생기는 일종의 오타다. ‘듄아일체’는 EBS와 내가 하나가 될 정도로 EBS 수능 교재를 달달 외운다는 뜻이다. ‘닥듄공’은 닥치고 EBS를 공부한다는 의미의 말이다.
 


EBS 교재가 학교 교과서를 대체한 데 이어 사교육 시장과 출판업계마저 점령했다. 정부가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2010년부터 수능 문제의 70% 이상을 EBS 교재에서 출제하겠다는 방침을 정한 뒤 나타난 현상이다.
 

 

 


 

 

수능 문제집이나 참고서는 표지에 ‘EBS’라는 문구가 들어 있지 않으면 아예 팔리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출판사들은 EBS를 발췌·요약해 재가공하는 방식으로 교재를 만들어 팔고 있다. 학원 강사들도 EBS 교재를 재편집해 쓰거나 EBS 학습법 특강, EBS 변형 문제 집중 풀이반 등의 간판을 내걸고 수험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지난 9일 EBS는 교육업계의 이 같은 현상에 대해 강경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자사의 교재를 무단으로 발췌·요약하거나 현직 강사진이 아닌 저자나 강사를 ‘EBS 강사진’이라고 표기할 경우 민·형사상 조치를 취하겠다는 공문을 출판사와 사교육업체에 발송했다. 수험생 제보 사이트도 운영 중이다.
 


위법한 행위에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교육업계에서는 EBS의 이번 조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 정부의 수능 연계 방침 덕에 공룡 지위를 누리고 있는 EBS가 이제는 다른 업체를 말살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출판사의 사정은 심각하다.


 
교육컨설팅업계의 ㄱ씨는 “한때는 좋은 교재를 만들기 위해 현직 교사와 대학교수 등 다양한 연구진을 두고 개발 작업을 하던 출판사들이 이제는 EBS 짝퉁 교재나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또 “생존을 위한 자구책이자 정부 정책이 빚어낸 일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현재의 구조대로 하면 문제 출제와 학생들의 학습 방식이 EBS를 중심으로 획일화하면서 수능의 취지와는 거리가 먼 암기 위주의 옛 학력고사 수험 방식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학교 교실에서조차 EBS 교재가 교과서를 대체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외국어(영어) 영역에서는 EBS 교재에 나온 지문이 그대로 수능에 나오거나 문제·보기 형식으로 활용된다.

 

 

이 때문에 전국 대부분의 고3 교실에서는 EBS 교재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중간·기말고사도 교과서 지문은 제외된 채 EBS 교재에서 출제되고 있다. 수업 시간에 EBS 방송 강의를 틀어주는 학교도 있다.
 


EBS 교재를 사용하지 않으면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까지 반발하기도 한다. 사교육 시장을 잡기 위해 내놓은 정책이 도리어 공교육을 황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교육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김승현 정책실장은 “정부는 EBS로 사교육을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오히려 공교육은 무시된 채 EBS 문제풀이 위주의 교육만 조장하는 꼴이 됐다”고 말했다.

 

 

또 “정부는 EBS 교재 위주의 수능문제 출제를 고집하고 있지만 대학들은 어려운 논술문제 출제로 또 다른 사교육 시장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덧붙였다.
 


정환보 기자 botox@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