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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량 해고와 징계의 광풍이 몰아치던 여름. 나는 낯익은 100여명의 후배들과 잠실의 신천역 부근에 있어 이름 붙여진 ‘신천교육대’라는 강제교육장에서 3개월을 함께 지내는 날들을 경험한다. 보이지 않는 창틀에 갇힌 후배들은 32년차 최고참 선배와 ‘교육 동기생’이 된 어색함, 참기 힘든 모멸감 같은 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내게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곤 했다. 교육이 끝나자 누구는 출퇴근하는 데 네 시간이 넘는 먼 곳으로, 누구는 헬멧을 써야 하는 신사옥 건설 현장으로, 또 누구는 겨울마다 스케이트장을 관리하는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MBC 노조원들이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사옥 앞에서 열린 총파업 출정식에서 '김장겸 사장 퇴진' 등을 요구하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30여년 전, 5공 군사정권 치하의 MBC 정동 사옥. 담배를 꼬나물고 우리를 이유 없이 꼬나보던 안기부, 보안사 기관원들이 제집 드나들 듯하던 현관, 그 길목에 커다란 한자 휘호가 걸려 있었다. 음수사원(飮水思源). ‘물을 마시면서 그 근원을 생각하라.’ 얼마나 좋은 말인가? ‘방송을 하면서 방송의 주인, 국민을 생각하라.’ 그러나 그 ‘근원’은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 전두환이 되는, 웃기지도 않은 역설이 회사를 지배했다. 영화 <모던 타임스>의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사를 조이는 작업을 반복하는 채플린처럼 우리는 ‘땡전 뉴스’의 아이템들과 대통령 찬양 특집을 찍어내고 있었다. 온 나라가 그랬듯 강요된 침묵 속에서, 바위처럼 굳어버린 체념으로 이따금 솟아나는 울분과 자괴를 누르던 나날이었다.

 

그렇게 부끄러운 오욕의 세월이 흘러 1987년, 분노의 들불이 전국을 뒤덮은 6월항쟁이 일어나고, 매캐한 최루탄 냄새를 안고 들어온 우리는 기관원들의 눈을 피해 체념과 자조를 털어내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해 12월 노동조합 결성. 그리고 마침내 1988년 8월26일, 방송사상 최초의 파업이 결행되던 날 노보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새벽이 다가온다. 6개월이 채 안된 딸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다. 이 아이가 나중에 커서 ‘아빠는 그때 뭐하셨어요?’라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단지 부끄럽지 않은 아빠, 엄마가 되려는 심정들이 뭉쳐서 가공할 힘을 만들어냈고 군사정권이 파견한 총독과 다를 바 없던 사장의 철옹성을 무너뜨렸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고자 했던 자유의 DNA는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 훗날 ‘그들’이 아예 소멸시키려고 했던 그 DNA는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에서 장르마다 창의력 넘치는 명품들을 빚어냈고 MBC는 ‘만나면 좋은 친구’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우리는 그때 전혀 예감할 수 없었다. 역사가 다시 후퇴할 줄은. 2012년 이후에도 쉼 없이 광풍이 몰아치던 작년 봄, 나는 해고되거나 머나먼 변방으로 쫓겨난 후배들과 오랜만에 술자리를 가졌다. 해직 후배 이용마의 암 투병 소식이 전해진 날이다. 당사자들과 그 수많은 가족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모욕을 안겨준, 교활하게 진화된 악랄함은 방송사를 총칼로 점령했던 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가 아니겠는가? 그들은 그렇게 해서 그들의 입신영달을 위협했던 자유와 저항의 DNA를 말살하는 데 성공했다며 자축 파티를 벌였을지 모른다.

 

세월은 또 흘러 시민들의 빛나는 ‘촛불혁명’이 일어났지만 MBC를 지배한 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송인들의 자유를 권력자의 손아귀에 헌납하고도 방송 독립의 최전방에 선 전사처럼 결사항전을 선언한 사장. 영화 <공범자들>에서 최승호 PD를 향해 “방송의 미래를 생각합시다!” 외쳐대던 부사장. 이렇게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 앞에서 <무한도전> 김태호를 비롯한 예능 PD들은 “사람들 웃기는 방송 만들려고 예능 PD가 됐는데 그거 만들라고 뽑아놓은 회사가 정작 웃기는 짓은 다 한다. 이젠 제발 그만 웃기고 회사를 떠나라!” 일갈을 날렸다. 이런 의기가 바로 MBC를 되살려 낼 DNA다.

 

이제 다시 파업이 시작되었다. 내가 아는 후배들은 무슨 투사가 아니라 상식과 염치를 아는 ‘방송쟁이’일 뿐이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갈구할 따름이다. 지금도 회사 현관에 걸려 있는지 모르지만 ‘음수사원’의 진정한 의미- 방송의 주인, 국민을 늘 생각하고 시민사회의 정신을 구현해 낼 것인가? 파란만장한 MBC의 수난사를 생생히 체험했던 나는 정(正)이 사(邪)를 끝내 몰아내는 역사의 필연을 믿는다.

 

<이우호 | 전 MBC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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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디어로그 칸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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