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대통령궁에 불길이 치솟는다. 피노체트가 이끄는 반란군이 남미 최초의 합법적인 칠레 정부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마지막 순간까지 대통령궁을 사수한다. 쿠바 카스트로는 지원군 파병을 제안하지만 확전을 우려한 아옌데는 이를 거절한다. 투항할 경우 해외이주를 포함하여 신변을 보장한다는 반란세력의 최후통첩도 수락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결국 사망한다.

 

뉴욕 세계무역센터에서 폭발음이 들린다. 2대의 대형여객기가 초고층빌딩에 충돌하는 영화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미국 본토가 공격당하는 가운데 세계 최강국의 자존심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부시 대통령은 이 사건을 미국에 대한 테러로 규정한다. 미국 정부는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를 배후세력으로 지목한다. 이후 미·영연합군은 2개월 만에 아프가니스칸 전역을 함락시킨다.

 

위 사건은 모두 9월11일에 벌어진 역사적 비극이었다. 하지만 칠레인을 제외한 세계인이 기억하는 9·11의 풍경은 아쉽게도 2001년 미국에 고정되어 있다. 1973년발 칠레의 비극은 언론계로부터 남미국가에서 생긴 소소한 사건으로 치부되었다. 과연 두 가지 사건이 언론을 통해서 차별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전쟁억제가 아닌 전쟁보도가 언론의 의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새로운 분풀이 상대를 찾던 미국은 이라크라는 원유생산국을 지목한다. 베트남전 실패 이후 미군부는 반드시 이길 만한 상대와 전쟁을 벌인다는 전략을 세운다. 부시는 이라크 내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함으로써 자국민 보호와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는 거짓 명분을 내세워 동맹국들을 전쟁판으로 끌어들인다. 결과는 참혹했다. 전사자는 미군 117명, 영국군 30명, 이라크군은 약 2500명, 이라크 민간인 사망은 1300명에 이른다.

 

미국 CIA가 조종하는 피노체트 반군은 쿠데타에 성공한다. 칠레에서 자신의 명령 없이는 나뭇잎 하나도 움직이지 못한다던 피노체트는 장장 17년간 공포정치를 펼친다. 그는 쿠데타 직후 3개월 동안 무려 1800여명의 시민을 도살한다. 이후 남미와 유럽 등지에서 4000여명의 정치범을 추가로 살해한다. 피노체트 정권은 강간, 손발톱 뽑기, 썩은 음식과 죽은 동료의 인육 먹이기 등의 잔인무도한 고문을 자행한다.

 

역사적 가정을 해보자. 만일 미국과 칠레의 9·11이 뒤바뀐다면 세계 언론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미국에서 벌어진 사건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전파될 것이다. 마치 세상의 모든 테러는 미국과 서유럽에서만 일어난다고 호들갑을 떨 언론사가 지천에 널려 있다. 불행히도 칠레는 언론의 관심사가 아니다. 제3세계라는 차별적인 언어로 취급하는 지역의 사건·사고는 환영받을 만한 뉴스감이 되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권력투쟁으로 인한 집단사망이 이어지고 있다. 어떤 죽음은 언론의 무관심으로 조용하고 쓸쓸하게 자취를 감춘다. 또 다른 죽음은 언론의 관심으로 오래도록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이러한 언론의 구별짓기 현상은 죽음의 차별화를 당연시하는 우매한 대중을 양산한다.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죽음은 없다. 전쟁을 둘러싼 세상의 뉴스는 평등하게 다뤄야 한다.

 

한국의 언론은 어떤 시선으로 역사를 해석하는가. 행여나 언론이 특정집단의 입맛에 충실한 기사에만 집착하지는 않는지 반성과 점검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언론이란 모든 형태의 권력을 감시하고, 권력과 투쟁하고,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려는 공명정대한 존재여야 한다. 영원한 언론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언론권력이라는 미혹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만 한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란한 인문학> 저자>

 

Posted by 미디어로그 칸미디어
T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