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의 득세가 뚜렷하다. 터키의 에르도안, 헝가리의 오르반,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등이 대중의 지지를 받아 선거로 집권에 성공했다. 유럽에서 극우 정당의 발호가 두드러진다. 난민 포용정책을 반대하는 극우파가 득세하는 현실을 보며 메르켈은 더 이상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트럼프는 중간선거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라 밖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이 우리 정치현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예를 들어, 난민 반대를 주장하는 청와대 청원에 70만명이 단기간에 몰려 찬성했던 일이 그렇다. 여성차별, 징집, 난민 사안에 몰입해서 험한 말을 주고받다 못해 치고받는 젊은이들을 봐도 그렇다. 주류 매체에서 소외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늙은이들이 유튜브와 카카오톡으로 현대사와 고대사를 배우는 현실도 그렇다.

 

세상 모든 일이 걱정거리인 서생인지라 흥미로운 제목을 달고 들어온 초청장 한 통에 마음이 흔들렸다.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가 보낸 e메일은 ‘인간존엄은 자유로운 사회를 위협하는 트로이 목마인가?’라고 물었다. 발표자인 손제연 박사의 초록에 놀라운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최근 많은 학자와 법률가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워 법적, 도덕적 논변을 펼치는데,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겠다는 매혹적인 명분으로 국가가 종교적 신념이나 사적인 도덕에 방만하게 개입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 누구나 스스로 존엄함을 주장할 수 있는 세상에서 새삼스럽게 존엄성을 이유로 타인을 억압하려는 자들이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성적 지향성을 선택한 개인에게 존엄한 인간본성을 내세워 그래서는 안된다고 타이르는 자들이 있다. 생존을 위해 피난처를 구하는 외래인에게 국가의 존엄한 정체성을 내세워 종교와 사상을 엄격하게 심사할 것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존엄한 인간본성이니 존엄한 정체성이란 용어가 특별히 혼란스럽다. 특히 존엄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존엄한 본성을 결정하겠다거나, 존엄함을 주장하는 집합적 주체가 등장하는 경우에 그렇게 된다. 예를 들어,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 존엄성을 따로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 위험하다. 특정 종교나 민족적 정체성을 가진 자들에게 속하는 존엄성이 별도로 있다는 생각도 그렇다. 도대체 존엄함을 주장하는 한 무신론자는 집단적 존엄성을 믿는 기독교인들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어떻게 논쟁하고 무슨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존엄성이 집단이나 제도에 속할 수 없고, 오직 개인에게 속한 가치라 한다면, 존엄성은 간단히 해체되고 만다. 개인에 속한 불가침의 가치인 존엄성이란 그냥 기본권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율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자유권, 즉 ‘시민적, 정치적 권리’일 뿐이다. 만약 존엄성이 이런 것이라면, 그것을 존엄하다고 부르는 일이야 별로 상관없겠지만, 그것을 따로 개념화해서 별도의 가치인 것처럼 취급하는 일은 불필요하다.

 

애초에 존엄이란 계급적인 용어였다. 로마 공화정의 원로원에 속한 귀족들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공화정의 집정관 또는 법무관은 지위에 따르는 권위, 즉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를 누렸다. 이 권위에 따르는 명성과 실권을 디그니타스(dignitas), 즉 존엄이라 한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는 자신이 부재중에도 집정관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한 법을 따르는 게 존엄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이 법을 무효로 만들어 자신을 공격하려는 원로원에 대항해서 싸울 이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로마 시민들의 지지가 자신의 명성과 위신을 보장한다고 믿었기에 끝까지 싸울 수 있었다.

 

과거 귀족만 누리던 존엄함을 모든 개인이 갖는다고 할 수 있게 된 까닭은 인권의 발전 때문이다. 법으로 인민의 시민적, 정치적 자유권을 보장하기 시작하면서, 시쳇말로 ‘모두가 귀족인 듯 행세하는 시대’가 열렸다. 따라서 각자가 명문화된 존엄을 주장할 수 있게 됐다. 이 시대는 그러나 모든 권리들이 서로 충돌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이 사회의 안전과 질서라는 가치와 충돌한다. 소수자의 권리 주장이 다수의 정체성을 위협한다.

 

이 대목에서 내가 존엄성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누가 사용하건 존엄성 논변은 타인의 권리와 가치에 대한 주장을 허물어뜨리는 최종 병기처럼 등장한다. 존엄을 이용해 기본권 간의 상충을 조화롭게 달성해야 한다는 원칙을 부정한다. 존엄을 이유로 더 이상 토론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논쟁을 매듭 짓는다. 심지어 자신이 존엄하기에 상대방을 경멸하고 혐오해도 좋다는 식으로 행동한다. 이 소모적 ‘인정투쟁’을 나는 달리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존엄성을 도구처럼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이념에 상충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준웅 | 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

Posted by 미디어로그 칸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