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칼럼+옴부즈만

[옴부즈만]리비아 보도 ‘명분’과 ‘현실’ 화학적 결합 기대

백병규 | 미디어평론가


지난주 경향신문 지면에도 ‘뜨거운 쟁점’들이 많았다.

일본 원전 사태를 계기로 원전의 안전성과 원전 위주의 국가 에너지 전략의 문제점을 심층적·다면적으로 다룬 원전특집(원전, 대전환 시점 왔다)을 비롯해 ‘신공항 백지화 문제’ 등 핵심적인 정치·사회 현안에서

민통선 난개발(3월28일), 다운계약서가 횡행하는 ‘은평 탈세 타운’(3월29일),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과세 추진(1일) 등 자칫 놓치기 쉬운 사안들에 이르기까지 빠트리지 않고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섬세함이 돋보였다.

경향신문이 짚은 여러 쟁점들 가운데 가장 긴장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리비아 사태’에 대한 상이한 시각들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아마도 김재영 충남대 교수(언론정보학)가 지난주 본란(옴부즈만)에서 경향신문의 ‘리비아 공습’ 관련 보도가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니었느냐고 문제제기한 바로 그날 지면에 내용상 이와 반대되는 조홍식 숭실대 교수(정치학)의 칼럼이 같이 실렸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김 교수는 다국적군의 리비아 공습이 명분상 아무리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주권국가인 리비아 내정에 외세가 어디까지 관여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또 군사적 개입이 과연 민간인 보호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도 현재로서는 ‘정답’을 내놓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경향신문 보도가 초기에 너무 이를 정당시한 것은 아니었는지 문제를 제기한 글이었다.

반면 조 교수는 자국민의 대량학살을 자행한 리비아 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군사개입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서방의 군사적 개입이 꼭 순수하다고만 볼 수 없고 아랍 국가들의 참여가 저조한 문제점들이 있지만, 유엔의 인도주의적 군사개입 결정은 ‘인간 해방’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당하다는 논지를 폈다.

여기에 이대근 논설위원도 3월31일자 기명칼럼에서 역시 ‘리비아 공습은 옳았다’고 주장하면서 북한과 민주노동당의 대응을 비판하고 나섰다.

대량학살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군사개입은 정당했으며, 이는 르완다와 코소보, 보스니아 등에서 겪은 참담한 비극에서 인류와 국제사회가 유엔을 통해 합의한 ‘인권보호우선’의 국제적 규범에 따른 것으로 보았다.

이 위원은 이런 점에서 북한이 “주권국가의 자주권에 대한 난폭한 침해”라고 나온 것은 “예상한 바”였으나, “진보라면 단 한 뼘이라도 앞서가야 하는” 민주노동당까지 ‘내정문제를 빌미로 무차별 포격할 권리는 그 어느 나라에도 없다’는 식의 “논평을 낼 줄은 몰랐다”고 비판했다.

이 문제를 진보논쟁으로 쟁점화한 셈이다.
여기에서 ‘북한문제’와 ‘진보논쟁’을 거론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김재영 교수가 지난주 본란에서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그동안 국제사회가 분쟁지역 등에 군사적 개입을 꺼려왔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군사적 개입이 장차 국제질서에 미칠 악영향에 대한 우려, 정당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신통치 않았던 역사적 경험도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다.

당장 경향신문이 전하고 있는 리비아 사태의 전개가 혼미하다.

다국적군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카다피 정권의 지상군의 화력은 여전히 반군보다 우위에 있어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다국적군은 지상군을 투입하든 반군에 무기를 지원하든 양자택일을 해야 할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지만, 국제사회의 여론이 갈리고 반정부군의 정체성에도 의문이 제기되면서 결단을 내리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이상 1일자 경향신문 리비아 관련 기사).

게다가 민간인 무장과 함께 다국적군 공습에 의한 민간인 피해도 발생하고 있다(2일자 리비아 ‘민간인’ 구별 모호…다국적군 고민).

리비아 사태가 자칫 장기 내전 양상으로 전개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리비아 공습에 참가하지 않은 자국 정부의 외교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3월30일자 기사에서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벵가지에서는 지금 카다피 지지자에 대한 무차별적인 체포와 처형이 자행되고 있다며 ‘무엇을 위한 개입’인지 의문을 나타냈다.

국제사회에서 명분론보다 현실론이 힘을 얻곤 하는 실태의 단면일 것이다.

자유를 억압하고, 반인륜적 범죄를 자행하는 국가와 정권에 대해 인류 보편의 가치에 입각한 국제사회의 ‘적극적 개입’을 지향하는 경향신문의 가치는 앞으로도 계속 가꿔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명분론을 앞세운 일면적 시각은 도덕적 울림은 클지 모르나 잘못된 현실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 역부족일 수 있다는 점에서 온전한 진보의 좌표일 수 있는지 의문이다.

경향신문의 기사 지면이 그렇듯이 경향의 ‘시각’ 또한 ‘명분’과 ‘현실’의 화학적 결합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