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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의제설정 능력 고민해야

임종수 | 세종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필자에게는 평소 경향신문에 대해 의아스러운 것이 있다. 이른바 ‘기자의 신문’이라는 경향신문의 의제설정력이 힘들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이 많은 경향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를 비롯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이 같은 느낌을 토로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3월14일 일어났던 여수 국가산업단지 내 폭발사고를 다루는 경향신문을 찾아봤다. 이 폭발사고는 6명이 숨지고 10여명이 중상을 입은 대형참사였다. 경향신문은 이튿날 일부 배달판에서 이를 다루지 않았다. 주말인 16일 8면에서 4개의 관련기사를 본격적으로 내보냈다. 뒤늦게 대처하기는 한 듯 보이지만, 중요 사안에 대한 순발력 있는 취재와 대처의 미흡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속보가 미덕인 시대는 지났다고 하지만 무엇보다 사안에 대한 첫 보도는 이후 총체적인 프레임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경향신문은 18일부터 관련사건을 심층적 기획기사로 다루었는데, 18일은 <하청노동자 잡는 위험 작업 외주화>(1면) 외에 5면에 3개의 기사를, 19일은 <“하청노동자 일 더 하려면 작업위험 따질 겨를 없다”>(1면) 외에 4면과 5면에 5개의 기사를, 20일은 <하청, 저가 재하청 못 버틴 사장 김씨 이젠 ‘일당 노동자’>(1면) 외에 2면과 3면에 4개의 기사를 실었다.


이들 기획기사의 중심 프레임은 ‘위험의 외주화’였고, 이는 최근 사회과학에서 흥미롭게 다뤄지고 있는 ‘위험사회론’을 배경으로 한다. 최근 수년 사이에 지속되는 각종 사건사고와 노동의 열악함을 한데 묶은 시의성 있는 기획이었다. 그런 점에서 위험의 외주화 프레임은 매우 적절하고 의미 있는 시도였다. 위험의 외주화는 비정규직 양산으로 대표되는 ‘노동의 위계화’를 좀 더 정밀하게 관찰하고 성찰한 성과이다. 지금까지 노동 이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위계화가 핵심 담론이었지만, 좀 더 세밀히 들여다보면 비정규 내부의 노동 위계화도 목격되기 때문이다.


(경향신문DB)


그런데 문제는 경향신문이 말하는 ‘위험’의 외주화가 역시 경향신문이 인용하고 기대고 있는 위험사회론의 ‘위험’과 꽤나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위험사회에서 말하는 위험노동은 ‘위험한’ 노동을 뜻하기보다 그러한 노동 위계화가 가져오는 삶과 노동 자체의 위험성을 뜻한다. 따라서 위험의 외주화 역시 노동의 성격이 위험하다는 데 방점이 있기보다(물론 위험사회론은 여기에도 관심을 가진다), 그러한 노동이 작동되게끔 하는 ‘시스템’과 그러한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삶’의 위험성을 지시하는 개념이다. 미묘하지만 큰 차이다. 이 사건은 개인화, 노동분화, 무한경쟁, 사회안전망 붕괴, 무한감시, 법감옥, 미디어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본격 위험사회의 징후를 비극적으로 보여준 사례이다.


물론 몇몇 기사는 이 같은 측면에서 위험 개념을 다루기도 했다. 하지만 필자가 이러한 판단을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흥미롭게도 위험의 외주화 프레임은 사건이 난 지 일주일 만인 21일에 이르러 감쪽같이 사라지고 전날 벌어진 유례없는 사이버 테러가 이를 대신한다. 놀라운 일 아닌가? 전례없는 국가기간망의 사이버 테러야말로 경향신문이 3일 내내 강조했던 위험사회의 전형적인 사례임에도 정작 경향신문은 이 프레임을 버렸으니 말이다. 당일 13면 <반도체 공장 노동자 백혈병 사망, 첫 산재 판정> 기사 역시 이 같은 프레임 안에 있음에도 이 기사는 외롭게 혼자였을 뿐이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별문제 없어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경향신문은 자신이 제시한 위험사회 프레임을 가장 극적인 순간에 폐기했다. 


필자는 이것이 경향신문의 미약한 의제설정력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과학성과 일관성, 집중력으로부터 비롯되는 의제의 시너지 효과. 이는 궁극적으로 기사의 문제라기보다 ‘편집’의 문제이다. 기사와 기사 간의 유기적 관계와 프레임은 해당 사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독립되어 보이는 기사 간의 ‘관계 안’에도 긴밀히 존재한다. 편집은 이를 드러내는 작업이어야 한다. 


경향신문이 다른 어떤 신문보다 여수 사건을 많이 다루었다는 사실과 성공적인 의제화 간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물론 이 사례 하나만으로 경향신문의 의제설정을 모두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경향신문은 그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할지도 모르고 어떤 기자들은 이 같은 접근은 신문이 할 일이 아니라고 강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신문이 해야 할 일이다. 개념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경향신문의 의제설정 능력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