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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칼럼] 보수언론의 무딘 감각

김종배 | 시사평론가

되짚지 말자.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하는 보수언론의 보도에 박근혜 의원을 띄우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렸다는 지적은 이미 나왔다. 되짚어봤자 구문이다.

이 또한 되짚지 말자. 보수언론이 바람보다 먼저 눕는 갈대의 감각으로 미래권력에 유리한 여론지형을 조성해온 전력은 이미 확인됐다. 되짚어봤자 재생 영상이다.

보수언론의 5·16 미화는 한나라당 안에서 ‘레임덕’이 공공연히 운위되고 ‘월박’이 버젓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나온 동조현상이다. 새로울 것도, 기발할 것도 없는 상투적 레퍼토리다.





짚을 건 따로 있다. ‘끝’이다. 박근혜 의원을 띄우려는 정치적 의도의 끝, 미래권력에 민감한 정치적 감각의 끝이다. 5·16 미화를 매개 삼아 발현된 보수언론의 정치적 의도와 감각이 소기의 성과를 낼 수 있을지가 관심사다. 그들의 5·16 미화가 박근혜 의원의 대선가도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가 관심사다.

결론부터 말하면 ‘글쎄’다. 오히려 그런 의도와 감각이 박근혜 의원을 나락으로 떠밀 수도 있다.

보수언론의 5·16 미화를 우려하는 시각엔 전제가 깔려있다. 5·16 미화가 박정희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박정희 향수가 ‘호박’ 정서를 키울 것이라는 전제 말이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전제가 지극히 도식적인, 또한 상투적인 선입견일 수도 있다.

개발은 몰라도 독재만은 잘못된 것 아니냐는 주장에 의지해 하는 말이 아니다. 개발 그 자체가 더 문제이기에 하는 말이다.

2007년 대선판이었다면, 이명박 정부가 성립되지 않았다면 이런 전제는 ‘참’이었을지 모른다. 그때 국민은 양극화에 시름 앓고 있었으니까,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사회·경제 개혁이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극심한 상실감에 빠져 있었으니까 ‘구관이 명관’이라는 식으로 개발과 성장의 박정희표 경제정책에 호의적이었을지 모른다.

아니, 실제 호의적이었다. 당시 이명박 후보가 내건 ‘747’ 공약에, 그의 개발·성장 담론에 다수 국민이 몰표를 던졌으니까 호의를 넘어 열광한 셈이다.

하지만 이제 아니다. ‘747’ 공약이 이륙과 동시에 추락하는 걸 지켜보면서, 성장한 건 물가지수와 실업률지수란 걸 확인하면서, 개발된 건 투기꾼의 먹잇감이란 걸 되새기면서 국민은 이명박 정부의 개발·성장 담론에 등 돌려버렸다. 박정희의 딸 이전에 박정희의 계승자가 박정희 향수가 허상이란 걸 확인시킨 덕에 더 이상 현혹되지 않는다.

이렇게 박정희의 계승자가 파탄 낸 박정희 향수를 박정희의 딸이 되살린다고 표가 날아들까? 아니다. 오히려 찬바람만 쌩쌩 불기 십상이다.

박근혜 의원이 말했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는 “5·16은 구국혁명이었다”고 했고, 2009년 10월에는 “아버지의 꿈은 최종적으로 복지국가였다”고 했다. 개발·성장 담론과 복지 담론의 교차지점에서 5·16의 성격을 미세조정한 것이다.

당사자인 박근혜 의원마저 컬러 보정에 나서는 판에 보수언론이 흑백필름 재생에 열을 올리면 일이 꼬인다. 복지를 만지작거리는 딸에게 아버지의 개발·성장 유훈을 계승하라고 다그치면 일이 틀어진다. 그들의 정치적 의도와는 정반대로 5·16은 디딤돌이 아니라 족쇄가 된다.

박정희식 개발·성장 담론을 부각하면 할수록 그때의 부의 집중과 지금의 부의 편중이 덩달아 각인되고, 박근혜 의원은 후광을 입는 게 아니라 그림자를 덮어쓰게 된다. 보수언론의 의도와는 반대로 약이 아니라 병을 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보수언론의 감각은 무디다. 권력의 풍향을 감지하는 후각은 발달했는지 모르지만 시대를 읽는 시각은 참으로 무디다. 고도근시가 너무 심해 한 치 앞을 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