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 |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지난 2월25일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다. 새 계절의 꿈틀거림과 함께 새 정부가 첫 걸음을 시작했지만 희망, 기대, 자부심과 같은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정권 출범 이전 불거졌던 각종 인사 논란과 정부조직 개편을 둘러싼 갈등으로 국민들의 정치 염증은 깊어졌고, 19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낮은 지지율로 새 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취임식에 많은 국민들을 초청하고 인기 연예인들을 대거 등장시켰지만, 감동도 무게감도 없는 미디어 이벤트에 그친 감이 없지 않다. 이러한 정치 현실을 반영하듯 취임 관련 보도 역시 빈약하기만 했고, 새 정부 출범을 축하하는 각종 기업 광고들만이 화려하게 지면을 장식했다.
새로운 정치, 신뢰할 수 있는 정치를 기대했던 시민들은 외려 더 깊은 실망감으로 정치를 외면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공연히 더 이상 뉴스를 읽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어쩔 수 없이 ‘방관자’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 이처럼 정치의 광장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고자 하는 많은 시민들에게 ‘저널리즘’은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가?
무엇보다 먼저 언론은 ‘정치’와 ‘소통’이 실종된 새 정부의 파행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대통령이 약속했던 대통합과 상생의 정치를 실천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취임식을 맞아 “소통하고 통합하고 상생하라”를 주문한 경향신문의 사설은 의미심장하다. 인수위 시기부터 복지 공약의 근간이 흔들리고 경제민주화 공약이 사실상 후퇴한 것에 대해 비판이 제기돼 왔다. 이 때문에 언론은 ‘신뢰’를 가장 큰 자산으로 삼아 왔던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로서 무엇을 약속했으며 현재 이것은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해 더욱 치밀하게 감시 보도해야 한다. 또한 대통령이 어디에서부터 ‘대통합’의 정치를 시작해야 하는지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이런 취지에서 2월27일자 14면 기사 <박 대통령, 쌍용차 해결해 대통합 첫발 떼었으면>은 주목할 만하다. 쌍용차 평택 공장 앞 송전탑에서 100일이 넘게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대통합’의 의미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향후에도 언론은 비정규직 노동자, 해직 언론인, 청년 실업자, 주거 취약층 등에 대한 지속적인 보도를 통해 소외된 사회경제적 약자들과 행복을 공유하는 것이 ‘대통합 정치’의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경향신문DB)
언론은 우리 정치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그 쇄신의 방향 역시 꾸준히 제시해야 한다. 배타적이고 비윤리적인 기득권층의 모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장관 후보들의 면면은 정치 염증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 인사를 통해 본격적으로 불거진 전관예우 문제, 더 근본적으로 정경유착의 문제에 대해서 끈질긴 후속 보도가 필요하다. 경향신문이 지난주 3일에 걸쳐 <전관예우의 ‘고리’를 끊어내자>는 기사를 연재한 것은 적절했지만, 퇴직 관료들의 취업 현황을 분석하고 현행법의 문제를 진단하는 것에 그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이에서 더 나아가 ‘신 정경유착’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원인을 파헤치고 유착이 초래한 결과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더 철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만이 전관예우를 받은 핵심 인물들이 다시 공직으로 돌아와 국가의 주요 임무를 맡는 파행을 막을 수 있고, 최소한의 공직 윤리, 정치 윤리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 무관심의 시대에 언론은 과거에 대한 엄정한 평가자 역할도 자처해야 한다. 전 정권에 대한 실망이 국민들의 정치개혁 열망을 부추겼던 만큼, 전 정부의 ‘실적’과 ‘과오’에 대한 엄격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전 정권 말기에 국민 여론이나 정서와 무관하게 실시된 측근 대사면이나 4대강 사업의 구조적 문제점은 지속적으로 보도되어, 현 정권이 명백히 입장을 밝혀야 하는 사안으로 쟁점화되어야 한다. 과거에 대한 반성도, 책임도 없는 정치가 시민들을 정치에서 소외시키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은 시민사회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방안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 언론은 정치에 기대지 않고 시민 스스로의 힘으로 삶과 사회를 건강한 방향으로 진보시키는 사례들을 지속적으로 제시해 줄 필요가 있다. 3월2일에 게재된 ‘동물학대’ 관련 보도는 그러한 ‘시민행동 프로젝트’를 보여준 좋은 사례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시민들의 무력감은 치유될 수 있을 것이며, 활기 있는 시민사회는 건강한 정치의 토대가 될 것이다. 지난 2월26일 타계한 프랑스 작가 스테판 에셀은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라고 일갈한 바 있다. 언론의 독자는 ‘분노하고 행동해야 하는 시민들’이다. 이러한 인식이 확고할 때, 정치 무관심의 시대에 저널리즘이 전해야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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