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채널을 돌리다 무심코 15~20번에 멈추게 되면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 주위를 돌아보던 게 불과 몇 달 전이다. 종편 방송을 보는 게 무슨 죄짓는 것도 아니건만, 왠지 모르게 나쁜 짓 하다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런 아빠에게 딸은 경향신문 기자가 종편 방송을 봐도 되느냐며 가벼운 힐난을 보냈다. 종편에 반대한다면서 왜 종편을 도와주느냐는 것이다.
TV 시청률은 표본으로 선정된 집의 TV 수상기에 측정장치를 미리 설치해놓고 채널 돌아가는 시간을 자동 집계하는 방식으로 조사된다. 그러니까 조사대상 가구가 아닌 집에서는 무엇을 보든 시청률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특정 방송을 시청하면 그 자체로 그 방송을 도와주는 것은 맞다. 어느 상품이든 수치로 집계되는 판매율 못지않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이 중요하다. 요즘에는 TV 방송을 인터넷이나 휴대폰으로 보는 사람이 많아 집 TV에만 의존하는 지금의 시청률 조사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장도리 (출처 :경향DB)
어쨌거나 종편은 요즘 약진 중이다. 수치로 나타나는 평균 시청률을 떠올리지 않아도, 조선·중앙·동아일보가 자사 종편의 어느 프로그램이 어느 조건에서 1위라고 아전인수식으로 자랑하는 것을 일일이 따져보지 않아도 종편의 인기는 여러 모로 체감할 수 있다. 시사프로에선 가스통 할배에서 나꼼수 멤버까지 출연자 스펙트럼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 예능프로는 여자들의 목욕탕 수다에서 단골 소재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제목부터 희한한 jtbc의 <썰전>이란 프로는 한국갤럽 조사에서 한국인이 즐겨보는 프로 10위에 오르기도 했다. 방송 사고가 나도 신문 사회면에 보도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고 지나가던 시청률 0%대 개국 초기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종편을 보느냐 마느냐 하는 고민은 어느덧 부질없게 된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종편을 대놓고 즐겨도 되나. 개인이 종편을 시청하는 것과 사회에서 종편을 인정하는 것 사이엔 아무래도 거리가 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종편은 이명박 정권과 거대 보수언론의 야합의 산물이다. 탄생의 근거가 되는 미디어법은 국회에서 여당 단독으로 날치기 통과됐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쇠사슬과 전기톱까지 동원해 법안 통과를 총력 저지하다 무위로 돌아가자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이 울렸다며 땅이 꺼져라 탄식을 했다. 미디어법의 원천무효를 선언하고 당 차원에서 종편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결기와 분노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했다.
종편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도 강했다. 민주진보 인사 중에 종편에 발을 들여놓는 이는 드물었다. 김연아·인순이 같은 사람은 종편에 출연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개념 없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시사평론가 서민 교수는 종편이 생긴 뒤 15~20 숫자가 싫어졌다며 이 채널을 TV 리모컨에서 삭제한다고 했다. 까마득한 옛이야기 같지만 알고보면 이 모든 게 겨우 2~3년 전 일들이다. 종편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이 엷어지는 데 걸린 시간이 이토록 짧다는 게 놀랍다.
유감스러운 것은 종편을 해금시켜준 일등공신이 민주당이라는 사실이다. 민주당은 종편 출연금지 당론을 채 2년도 못가 폐기했다. 그 전에도 적당한 핑계만 있으면 얼굴 내밀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것 같더니 지난 4월에는 정식으로 입장을 바꿔 출연 여부를 개인의 선택에 맡겼다. 곧바로 문희상·박지원·송영길 등 고위인사들의 출연이 줄을 이었고, 종편은 쾌재를 불렀다. 출연진 진용에 오른쪽 날개만 있다가 왼쪽 날개를 보강한 셈이니, 한층 높이 날 수 있는 새가 됐기 때문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3년 4월 2일 (출처 :경향DB)
민주당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했어야 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정당 정치인이 실재하는 언론매체를 언제까지나 보이콧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일말의 배신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미디어법 저지에 동참해달라고, 야당에 힘을 모아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하던 인사들이 슬그머니 종편 여기저기에 나와 진행자와 알콩달콩 박장대소하는 모습은 보기에 불편하고 어색하다. 당론을 뒤집어야만 했던 사정과 경위를 국민 앞에 소상히 밝히고 이해를 구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민주당은 종편의 편파보도가 대선 패배의 한 요인이니 출연해서 바로잡겠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리고 종편 4사에 “지금부터 우리도 본격 출연할 테니 불러달라”는 취지의 공문을 보낸 게 전부다. 오직 선거 유·불리의 잣대로만 판단할 뿐 종편에 대한 재인식이나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노력은 안 보인다.
종편은 지금 종합편성채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토크쇼나 시사논평 프로에 집중하고, 이를 재방에 재재방송까지 반복해 틀어대는 수법을 생존 전략으로 쓰고 있다. 몇몇 프로그램이 호평을 받는다 해도 곳곳에서 막말 방송, 편파 방송, 저질 방송이 여전하다. 악법에 의하든 말든 기왕에 생겨난 만큼 콘텐츠로 평가해야 한다는 논리를 수용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종편을 의미있는 미디어로 대접하기엔 아직 이르다.
이종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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