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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의 언론 대상 ‘명예훼손죄 소송’ 세계적으로 사문화…한국은 왜

대통령 측근이나 친·인척의 국정농단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보도가 연일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청와대가 툭하면 쏟아내는 ‘명예훼손’ 소송이 이번에도 발단이 됐다. 언론은 사실 규명 업무를 떠맡은 검찰의 수사 과정을 실시간 중계하고 있다. 논쟁의 당사자 격인 언론사와 청와대는 뒤로 물러나고 수사기관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셈이다.

세계적으로 명예훼손을 범죄로 형사처벌하는 나라는 극소수이다. 공권력이 언론을 고소해 맞서는 것도 유례가 많지 않다. 언론사가 제기한 의혹·비판 기사의 진상규명이 명예훼손이라는 틀로 수사기관에 넘겨지는 게 한국적인 독특한 메커니즘인 셈이다.

 

국정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정윤회씨가 검찰 출석 16시간이 지난 11일 새벽 2시경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 청사를 빠져나오고 있다. 정씨는 이번 사건의 배후 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검찰 수사 결과를 지켜보면 알 것"이라고만 말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법무법인 해마루의 최윤수 변호사는 11일 “세계적으로 명예훼손을 범죄로 규정해 처벌하는 나라가 드문 데다, 공권력이 검찰에 고소해 수사토록 하는 것은 민주주의 작동방식이 아니다”라며 “형법에서 명예훼손을 삭제하거나 적어도 공공기관이 고소인이 되는 것은 막아야한다”고 말했다.

현재 명예훼손죄는 세계적으로 거의 사라졌다.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유럽은 물론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폐지하거나 사문화했다. 우크라이나·조지아·루마니아 등 동유럽도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후 없앴다.

이 때문에 유엔인권이사회는 2011년 “한국 정부는 명예훼손죄를 형법에서 삭제해야 하고 공무원과 공공기관은 민주주의를 위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지 말라”고 했다. 그해 대법원도 명예훼손 판례를 바꾸어 “악의적이거나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공격이 아닌 이상 국가기관은 피해자가 아니다”라고 판결했다.

법무법인 민 주두수 변호사는 “법리적으로 죄가 되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청와대가 걸핏하면 언론보도를 고소하고 있다”며 “고소는 수사로 이어지고, 수사는 보도와 논쟁을 틀어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진행 중인 국정농단 검찰 수사도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이 세계일보 기자 등을 상대로 고소장을 제출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번에도 검찰 수사는 명예훼손 여부와 위법성 조각 사유 확인 등을 지나 사실상 청와대의 정치적 정당성을 입증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여 있다.

검찰이 독점하는 ‘공권력의 명예훼손’ 사건을 사회적으로 투명하게 풀어갈 대안은 없을까. 언론사의 한 법조출입 기자는 “세계일보가 제기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청와대가 구체적인 해명에 나서 무엇이 진실인지 국민이 판단토록 해야 한다”며 “그러고도 남는 의문이 있다면 많은 선진국들처럼 여야가 모여 있는 국회가 조사하거나 청문회를 벌일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