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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기고]최승호, 폭력, 그리고 ‘공범자들’

최승호를 처음 만난 건, 거의 20년 전 내가 핏덩어리 조연출이던 때였다. 그때 그는 「PD수첩」을 만드는 평PD였는데, 재벌의 족벌경영이나 교회 세습 같은 주제를 열심히 다루는 ‘교양PD의 전형’ 같은 선배였다.

프로그램을 완성하고 난 후의 뒤풀이 자리에서 멀쩡하게 생긴 PD가 엽기적인 막춤을 출 수도 있다는 데 놀라며, 여의도 어느 노래방에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날을 나는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좋은 날들이었다. 그러나 길지 않았고 MBC에는 암흑시대가 왔다. 해고당한 최승호는 얼마 후 “뉴스타파에 가기로 했다”란 말을 남기고 여의도에서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영화 <공범자들> 시사회장에서 오랜만에 최승호를 다시 만났다.

영화가 시작되자 몇 년 전의 강렬한 기억들이 소환되었다. 영화에 등장한 전 MBC 사장 안광한이 사용하는 ‘폭력’이란 단어와 관련된 기억들. 정윤회의 아들을 MBC 드라마에 ‘갖다 꽂았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안광한은, 약속 없이 찾아와 기다리고 있던 최승호를 피해 건물 복도를 이리저리 뛰어 도망다니며 고함친다. “이거 폭력이야. 폭력으로 네가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어!”

 

하기야 ‘폭력’이라는 단어는 지난 몇 년 동안 노조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요긴하게 잘 써왔던 일종의 클리셰다. 우선 2012년 파업 당시 보도본부장이었던 권재홍이 남긴 유명한 용례. 그는 퇴근길에 노조원들에게 폭력을 당했느니 아니니 시끄러웠던 소위 ‘할리우드 액션’의 주인공인데, 노조원들에 의해 타박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했다던 그는 이후 물리적인 접촉이 없었음을 인정하면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노조원들에 의해 상처를 입은 사실은 없습니다. 다수에 떠밀려 차량으로 이동하던 중 발을 헛디딘 것이 전적으로 저의 잘못이라면 그것 역시 제가 감당할 몫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물리적인 타격만이 폭력인가요?”

 

앵커 배현진이 남긴 용례도 있다. “때로 불성실한 후배를 다잡기 위해 공공연한 장소에서 불호령을 내리거나 심지어 폭력을 가하는 믿기 힘든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말하자면 ‘노조 탈퇴 이유서’ 정도 되는 이 글을 남긴 후 그는 뉴스데스크 앵커로 홀연히 복귀했다.

 

슬라보예 지젝이란 철학자가 쓴 <폭력이란 무엇인가>란 책이 있는데 첫 부분이 이렇게 시작한다. “물건을 훔쳐낸다는 의심을 받던 일꾼이 한 명 있었다. 매일 저녁, 일꾼이 공장을 나설 때면 그가 밀고 가는 손수레는 샅샅이 검사를 받았다. 경비원들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손수레는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결국 진상이 밝혀졌다. 일꾼이 훔친 것은 다름 아닌 손수레 그 자체였던 것이다.”

 

지젝은 말한다. ‘폭력’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범죄나 테러행위, 사회 폭동 같은 것만을 떠올리지만, 이렇게 직접적이며 가시적인 ‘주관적 폭력’, 즉 명확히 식별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르는 폭력만 ‘폭력’이라고 인식하는 틀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구조적 폭력’은 일꾼이 매일 도둑질했던 게 손수레였던 것처럼, 뻔히 보이면서도 장물로 감지되지 않는 폭력이다.

 

공영방송사들의 상황은 어떤가? 기자가 취재현장에서 ‘너네 따위의 기자는 필요 없다’라는 소리를 들으며 쫓겨나는 상황. 힘들게 취재한 기사가 난도질당하거나 아예 방송될 수 없게 되는 상황.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이 이유 없이 불방되는 상황. 이런저런 이유로 PD들의 취재가 처음부터 원천봉쇄되는 상황. 이런 일들은 거대한 구조적 폭력의 한가운데에 공영방송사들이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공범자들>은 ‘폭력, 폭력’ 운운하는 그들이,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하면서 구조적 폭력에 가담하는 위선자들’임을 폭로한다.

 

상찬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강력히 추천한다.

 

<김만진 MBC 콘텐츠제작국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