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 국내 방송계에서는 때아닌 힙합 열풍이 불고 있다. 케이블 채널에서 래퍼들을 선발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대중의 지속적인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쇼미더머니>는 네 번째 시즌으로 지금 방영 중이며, 여성 래퍼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언프리티랩스타>가 올 상반기에 방영됐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힙합 음악 장르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과 더불어 노래 속 가사가 자극적이고 노골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젊은 세대가 경험하는 억압적 상황, 인간관계의 모순 등 사회비판에 적극적인 힙합 음악에 대해 젊은 세대들의 호응은 클 수밖에 없다. <쇼미더머니> 시즌4의 1차 지원자가 약 7000명에 달한다는 내용만 봐도 국내에서 힙합 음악이 얼마나 관심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음악 장르를 방송 프로그램에서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지는 제작진의 또 다른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데, <쇼미더머니>가 시즌1부터 지원자들의 비속어나 욕설 등으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꾸준히 ‘주의’를 받아왔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짧은 시간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지원자들은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므로 타인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이 돋보여야 한다는 프로그램의 근본적 틀을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힙합 장르에서 보여주는 비판정신이 상대방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거나 사회적 약자를 무시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힙합이 젊은 세대의 호응과 더불어 하나의 대중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사회 부조리에 대한 적극적 비판, 약자와 가난에 대한 억압적 상황을 힙합에서만 가능한 ‘거친 언어’로 표현하기 때문이었다.
Mnet <쇼미더머니4>_경향DB
하지만 현재 국내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경쟁자에 대한 노골적 비난만 남았다. 일례로 <쇼미더머니> 시즌4에서는 한 지원자가 여성을 비하하는 내용의 가사를 선보이면서 시청자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고, 여성 래퍼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언프리티랩스타>는 여성을 바라보는 문제적 시선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예쁜 척하지 않는 실력파 여성 래퍼들의 힙합전쟁’을 선보이겠다고 선언했지만, 여성 지원자들 간의 노골적 비난, 심사위원들이 여성을 평가하는 시선 등 서로를 비난하는 경쟁 과정만 방송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힙합을 하는 여성 래퍼들은 그냥 “센 언니”가 되고 말았다.
힙합이 하나의 음악 장르뿐만 아니라 문화적 현상으로까지 논의되는 이유는 탄생 배경 때문일 것이다. 힙합은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시작되었는데,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이 이루어졌던 인종 문제,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계층들의 울분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정책의 부재 등을 힙합 음악 가수가 노래 가사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제작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속의 힙합 음악은 ‘힙합 정신’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힙합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활용되면서 힙합 정신을 실천하고 즐기기보다는 경쟁자를 끌어내리는 데에만 활용되기 때문이다. 상업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방송 프로그램 속 힙합의 언어는 더욱 잔인해지고 저항의 의미는 변질되기에 이른다.
이렇듯 저항으로서의 힙합 문화를 외면하고 경쟁에만 치우친 프로그램 제작 방식은 결국 <쇼미더머니>에 출연한 지원자로 하여금 여성혐오가 담긴 내용을 거침없이 노래하게 만들었고, 이를 인지하지 못한 심사위원과 제작진의 실수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초래하고 말았다. <언프리티랩스타>는 여성 래퍼들의 실력만으로 경쟁을 하겠다고 했지만, 방송 후에 인기를 얻은 여성 래퍼들은 화보집을 찍거나 리얼리티 쇼에 출연하고 있다.
지금의 래퍼 서바이벌 방송을 보면, 힙합 문화의 저항의 ‘방식’만 남고 저항의 ‘정신’은 사라진 것 같다. 신자유주의 시대, 모든 것을 자본의 가치로 측정하고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만 중요해지면서 다른 모든 가치들은 점점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경쟁관계가 주를 이루는 오디션 프로그램 속 세상을 어떻게 재현하는가는 대중에게, 시청자에게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수많은 오디션 지원자들도 보고 있을 서바이벌 프로그램 속 세상은 현실의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힙합의 본질적 의미, 힙합 음악 장르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왜 힙합 음악이 저항적 의미들을 유지해야 하는지 등 좀 더 깊은 고민이 반영된 프로그램을 만들어주길 제작진에게 부탁하고 싶다.
이종임 | 고려대 미디어학부 강사
'미디어칼럼+옴부즈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화비평]무도가요제와 ‘평창쓰레기’ (0) | 2015.08.18 |
---|---|
[시대의 창]백주부와 최동훈 감독, 그리고 아저씨론 (0) | 2015.08.13 |
[문화비평]‘패밀리테인먼트’의 탄생과 환멸 (0) | 2015.07.21 |
[문화비평]‘세습사회’ 부추기는 TV 예능 (0) | 2015.07.14 |
[시론]메르스 사태에 방송 공정성을 다시 생각한다 (0) | 2015.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