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혐오, 저것도 혐오라 한다. 만사 혐오요, 혐오 만정이다. 감염원에 대한 경계도 혐오, 무분별한 경계에 대한 질타도 혐오, 질타를 바로잡는 지적도 혐오라 한다. 혐오는 이제 다른 시민의 부정적 감정표현에 맞서는 일종의 주문이 됐다. 마치 이 주문만 외우면, 주문을 외우는 자의 도덕적 책무는 면제되고 상대편의 혐오 정서만 욕되게 남는다는 식이다.
일단 이것부터 구분해 보자. 감염원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타인을 경계하는 마음은 불안 또는 염려를 표현한다. 혐오가 아니다. 압도적인 기세로 퍼지는 전염병을 보면서 우리가 함께 느끼는 정서는 공포다. 혐오가 아니다. 병균에 감염된 사람이 단순한 불찰을 넘어선 무모한 행동으로 우리 공동체에 감염을 유발했다면, 그에 대한 책망은 흔히 분노를 동반한다. 혐오가 아니다. 역병의 창궐을 정치적 기회로 활용해서 정적에 대한 증오 발언을 일삼는 자를 보면서, 나는 경멸감을 느낀다. 이는 혐오와 유사하지만, 역시 혐오는 아니다.
용어의 문제가 아니다. 혐오가 아니라 불안, 공포, 분노, 경멸 등 정확하고 적절하게 용어를 사용하면 된다는 제언이 아니다. 사회적 불안이나 공포를 혐오라 하고 그렇게 몰아가면, 정책적 대응 방식이 바뀐다. 사태를 확인해 원인에 대처하는 대응 정책이 아니라 봉쇄나 청산 정책을 취할 우려가 있다. 증오나 분노를 혐오라 하고 그런 내용으로 책망하거나 칭찬하면, 그에 따른 도덕적 책임의 결이 달라진다. 책임져야 할 사람의 도덕적 의무를 무심결에 면제하는 효과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혐오란 용어는 모든 부정적 함의를 갖는 도덕적 평가나 정서적 표현을 그저 ‘혐오표현’이라 싸잡아 부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유행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체계적 억압을 그저 ‘여혐’이라 하고, 어느 사회에나 있을 법한 이방인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를 그저 ‘외국인 혐오’라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체계적 억압을 혐오라 부르면서, 제대로 된 투쟁과 저항을 조직하기 어렵다. 불안을 혐오와 같이 취급하는 자들에게서 효과적인 정책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 사회에 곪아 터지는 부패나 정실주의에 대해 정당하게 혐오를 표현하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정작 혐오를 표현해야 마땅한 경우인데 혐오가 없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저 혐오라 하지 않고 ‘혐오와 차별’이라고 병기하거나 ‘혐오차별’이란 복합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혐오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정적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생각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혐오와 차별은 내용이 크게 다르다. 혐오는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느끼는 정서다. 차별은 사회적 관습이요, 제도요, 정책이다. 이 두 용어를 무차별하게 결합해서 어떤 정교한 인식을 얻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차별은 철폐의 대상이다. 혐오나 증오와 동급일 수 없다. 무심한 차별이라거나, 어쩔 수 없는 차별이라거나, 경계가 모호한 차별이란 없다. 경계를 세밀하게 따져서, 오래된 관습에 전략적 고려를 더해서, 차가운 이성으로 제도화한 억압이 곧 차별이다. 차별은 흔히 증오나 혐오 정서를 표현하는 말로 정당화되기도 하지만, 증오 발언을 규제한다고 해서 차별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차별을 금지하는 제도를 갖추어야, 이유 없는 증오나 핑계 좋은 혐오를 줄여나갈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사적 영역에서 차별금지를 명문화한 법조항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공적 영역은 물론 사적 영역이나 경계 영역에서 성, 연령, 인종, 종교 등 집단표시를 이용해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일은 불법임을 명확히 선언하는 명문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내 신념의 원천에 분노와 혐오가 있다. 성적 차이를 차별 근거로 활용하는 자를 겨냥한 분노와 억압과 차별로 타락한 현실을 보호하려는 자에 대한 도덕적 혐오 말이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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