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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누가 그들을 죽이는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허튼소리다. 옹근 10년 전, 포항에서 건설노동자가 참혹하게 숨졌을 때 “비정규직 노동자를 더는 죽이지 말라”는 칼럼을 썼다. 2016년 곰비임비 이어지는 비정규직 벗들의 죽음 앞에 참담한 까닭이다.


한가위를 앞둔 9월13일 경북 김천의 고속열차 구간에서 한밤에 철길을 고치던 두 사람이 참사를 당했다. 둘 다 철도공사가 ‘외주’를 준 비정규직이었다. 현장 노동자와 공사 사이에 소통은 없었다. 중간에 외주업체가 있어서다. 현장의 두 사람은 경주 지진으로 지연된 고속열차가 그 시각에 지나간다는 통보를 받지 못했다. 지난 5월28일 지하철 구의역에서 열아홉 살 비정규직이 처참하게 죽은 원인과 똑같다. 당시 뜯지도 못한 컵라면이 인터넷에 오르내리면서 신문과 방송도 모처럼 보도에 나섰다. 비정규직 착취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사뭇 높았다. 하지만 ‘온라인 분노’가 시나브로 잦아들며 법제화 움직임도 사라졌다.


그 날로부터 100일도 되지 않은 9월3일, 지하철 성수역과 용답역을 잇는 장안철교에서 보강 공사를 하던 20대 비정규직이 추락해 또 숨졌다. 하지만 구의역 때와 사뭇 달랐다. 경향신문과 몇몇 언론이 철교 아래 분향소 표정을 기사화했지만, 대다수 신문과 방송은 외면했다. 철교 기둥에 “청년의 죽음을 애도해 주세요”라는 글이 을씨년스럽게 붙었다. 본디 산업안전보건법은 10m 넘는 높이에서 일하려면 자격증이나 전문교육을 이수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비정규직 청년은 그러지 못했다. 외주가 낳은 또 다른 참극이자, 스마트폰의 감성적 표출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생생한 교훈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가장 열정적이고 조직적으로 제기해 온 곳은 어디일까. 사실에 근거해 증언할 수 있다. 권력에 용춤 추는 언론이 노상 ‘기득권’으로 몰아친 민주노총이다. 민주노총은 9월8일에도 ‘간접고용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쟁취를 위한 기자회견’을 국회 앞에서 열었다. 회견문은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업체가 바뀔 때마다 집단해고,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수천명이 해고되고 있으며 대한민국 전역이 비상사태”라고 절규했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20대 국회에 호소한 기자회견을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이 묵살했다. 기실 민주노총을 ‘이기주의 집단’으로 살천스레 매도해온 ‘금수저’가 바로 권력과 자본의 나팔수인 저 ‘언론 귀족’들 아니던가. 비정규직들이 도살장으로 줄을 이어 끌려가는 꼴인데도 이를 막을 최소한의 입법조차 못하는 민주공화국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한 사회가 풀어야 할 정책 과제를 의제로 설정해나가야 옳은 언론은 비정규직들의 죽음을 모르쇠 해왔다. 언론이 제구실을 못하면서 ‘외주화’는 대기업은 물론 공공부문에 이르기까지 관행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도 대기업은 업무 효율과 이익 극대화를, 공공부문은 선진화와 정상화를 부르댄다.


더 늦기 전에 우리 모두 차분히 짚어야 한다. 대체 비정규직의 잇따른 죽음은 누구 책임인가? 일차적으로 권력과 자본이다. 비용 절감의 이윤 논리 아래서 노동자들의 창조성은 차치하고 안전과 생명마저 시들방귀로 여겼다. 외주화가 노동자들을 위험에 내몰고 열차 안전도 위협한다고 반대해 온 철도노조는 일찍이 언론 귀족들이 마녀로 사냥했다.


입법을 외면한 국회의원들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저마다 헌법기관을 자임하는 그들의 특권만큼 저들의 직무유기 또한 특별하다. 그 못지않은 책임이 언론에 있다. 일터의 야만성을 의제로 설정해오지 않은 언론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한 맺힌 죽음에 최소한 공범이다.


언론만이 아니다. 비정규직들의 줄 선 죽음 앞에 침묵하거나 자본이 떨궈주는 떡고물을 챙기며 획일적 경쟁체제를 비호해온 교수들의 책임도 물어야 옳다. 천박한 자본의 논리가 대학까지 깊숙이 파고들었기에 더 그렇다.


무릇 언론과 대학이 살아있다면 권력과 자본이 대한민국처럼 망가지진 않는다. 권력을 감시해야 할 언론이 되레 권력을 추구할 때, 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연구하고 제시해야 할 대학이 자본의 논리를 좇을 때, 그 나라의 내일은 무장 어두울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젊은 세대가 문제의식도 비판정신도 없다고 개탄한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언론을 죽인 것은 독자나 시청자가 아니라 언론 귀족이듯이, 대학정신이 죽어가는 이유도 대학생에게 있지 않다. 권력과 자본에 줄 선 교수들에게 있다.


지난 5년 대학에 몸담으며 젊은 친구들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미디어를 비평해나갈 힘도, 대학에 더 머물 이유도 없다. 앞으로 10년이 지나 2026년에도 ‘비정규직 노동자를 더는 죽이지 말라’거나 ‘누가 그들을 죽이는가’ 따위의 칼럼을 써야 할까.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손석춘 | 건국대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