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티셔츠를 입었다. 티셔츠는 폭염만큼 뜨거웠다.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일로부터 분리되고, 티셔츠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집단따돌림을 당한다.
스마트폰 사용으로 정보를 수용하는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면서 우리는 여론의 급격한 응집과 와해 현상을 반복적으로 목격한다. 언제 어디서나 궁금한 것을 검색할 수 있고 그 속도도 매우 빠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험을 한다. 책 <인간 인터넷>에서 코네티컷 대학교 철학과 마이클 린치 교수는 이를‘구글노잉(google knowing)’이라고 부른다.
김자연 성우 트위터
구글노잉 시대는 여러 가지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현상도 야기한다. 때론 잘못된 정보가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순식간에 퍼진다. 소셜미디어의 발달은 자신이 믿는 것만을 믿고 싶어 하고 그에 따른 팩트만 수집하는 확증편향을 더욱 강화한다. 너무 빠르기 때문에 성찰이 개입할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 한 장의 티셔츠가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 ‘메갈리아4’가 제작한 여성주의 티셔츠가 그 주인공이다. 티셔츠에는 ‘여성은 왕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슬로건이 적혀 있다. 이 티셔츠 슬로건은 ‘한 장의 페미니즘’이었다.
여성혐오 페이지인 ‘김치녀’는 계속 방치하면서 ‘메갈리아2’ ‘메갈리아3’ 등 여성주의 페이지를 뚜렷한 근거도 없이 페이스북 측이 일방적으로 폐쇄한 것에 항의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당초 티셔츠 판매 목표를 1000만원 정도로 잡았으나 무려 1억5000만원어치나 팔렸다.
게임회사 넥슨이 이 티셔츠 인증샷을 소셜미디어에 올린 한 여성 성우를 교체한 것이 논란의 발단이 됐다. 사용자들의 항의에 직면한 회사 측은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순식간에 파장이 커졌다. 일부 유명 웹툰 작가들이 교체된 여성을 옹호하는 발언을 트위터 등에 올렸다. 이에 대해 일베와 오유 등 커뮤니티 회원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웹툰 작가의 신상을 털며 불매운동을 시작했다. 이 작가들의 작품을 거부하는 ‘메갈컷’이라는 크롬 플러그인도 등장했다. 가수 안예은씨도 넥슨 성우를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가 집단 공격을 당했다. 급기야 많은 사람들이 사과문을 올리는 사태에 이르렀다.
일각에서는 ‘옥시 살인’에 대한 불매운동도 실패했는데, 좌우를 넘어 결성된 반여성주의 남성연대의 힘은 진정 강력했다는 자조 섞인 한탄도 나왔다. 나도 이 글을 쓰는 동안 일말의 두려움을 느낀다. 심지어 이들은 정부의 웹툰 검열을 촉구하는 이른바 ‘예스컷’ 운동까지 시작했다. 정의당마저 성명을 발표했다가 취소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그들은 누구이기에 진보정당마저 쩔쩔매게 할 정도로 강력한가. 정치적 관점에서는 극과 극인 일베와 오유 커뮤니티는 왜 메갈리아에 맞서는 강력한 남성연대를 구축했을까. 넥슨 사건부터 ‘예스컷’ 캠페인까지 걸린 기간은 10일 남짓이었다.
무엇이 이 광기를 부추기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티셔츠 입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까. 성찰이 수반되지 않는 정보는 사람들을 빠른 결론으로 이끈다. 그런데 모두가 동의하는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없듯이, 합리적 근거가 취약한 의견은 그것이 올바르다고 해도 공동체를 파괴하는 경향을 갖는다.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이끈다.
마이클 린치에 따르면 ‘집단 극화(group polarization)’는 어떤 의견을 제시할 때 합리적 근거를 내놓지 않고, 다수의 입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실제로 기업, 정당, 작가들을 향해 압력을 행사하는 남성들은 한국의 성차별이 매우 심각하다는 실질적 근거들을 외면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한국의 남녀 임금격차가 2000년부터 부동의 1위이며, 2014년 기준 여성의 임금은 남성에 비해 36.7%나 적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유리천장지수가 조사대상 29개국 가운데 29위라는 사실도 배제한다.
메갈리아를 단순한 막말집단으로 두들겨 남성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려는 그들은 스스로를 스마트폰섬에 유배시킨 채 일부 사용자들의 미러링에 의한 극단적 표현 수위만을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삼는다.
이렇게 형성된 새로운 ‘부족’은 다원주의나 합리적 근거 대신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는 방향으로 돌진한다.
인터넷은 이제 상상보다도 더 강력해졌다. 이제 하나의 삶 그 자체다. 하지만 여론의 극단화 현상을 이끄는 ‘네트워크 악마’로서의 이빨도 드러내고 있다.
의심과 질문이 더 많아져야 한다. 영국왕립학회의 좌우명은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믿지 마라(nullius in verba)”이다. 인터넷에도 이런 좌우명이 필요해진 것 같다.
유승찬 | 스토리닷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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