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존재할까. 자고 나면 나라 꼴이 더 망가지는 2016년 가을, 뜬금없는 물음을 던진다. 도스토옙스키의 통찰을 나누고 싶어서다. “만일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인간이 그것을 만들어낸 것이 된다. 인간은 자기 모습과 닮은 모습으로 악마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기실 누군가를 겨냥한 ‘악마화’는 가진 자들의 상투적 수법이다.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만이 아니다. 자신이 누리는 부와 권력을 위협하는 민중운동에 ‘악마’ 딱지 붙이기는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도 군부독재 정권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청년학생과 노동자, 농민을 살천스레 악마로 몰았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부는 퇴각했지만, 그들의 논리는 군부가 키워온 신문사와 방송사들을 통해 퍼져 왔다.

 

고 백남기의 죽음을 둘러싼 대한민국의 살풍경은 그 필연적 결과다. 건강했던 농민이 서울에 와서 집회와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숨졌는데도, 현장 경찰부터 대통령까지 공권력 선상에 있는 어떤 ‘인간’도 사과하지 않고 있다. 유족을 위로하는 최소한의 예의는커녕 되레 고인과 관련된 사람들을 ‘악마화’하는 자들이 줄이어 나오고 있다.

 

보라. 아비의 한 맺힌 죽음 앞에 오열하는 딸을 비아냥대는 저 정치모리배를 비롯한 숱한 ‘네티즌’을. 고 백남기를 조롱하는 저 가여운 영혼들을, ‘빨간 우비’가 백남기를 죽였다고 부르대는 저 무수한 글들을, 심지어 ‘빨간 우비의 정체는 고인의 아들’이라는 패륜적 망상까지 거침없이 써대는 저 무리를.

 

생게망게한 주장들에 담긴 논리는 간명하다.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악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서로를 죽일 수 있다고 믿는가. 아들이 물대포에 쓰러진 아버지를 살해할 수 있다고 어떻게 감히 상상하는가. 그 악마적 믿음과 상상, 빨간 우비를 수사하라는 외침은 대체 어디서 비롯한 걸까.

 

틈만 나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집회와 시위에 마녀사냥을 펼쳐온 이 나라 신문과 방송이 그 ‘주범’이다. 근거는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다.

 

저들이 즐겨 쓰는 ‘전문 시위꾼’이라는 기호, 미국 경찰은 ‘폴리스 라인’을 넘어서면 사살한다는 사실과 다른 주장, 민주노총이 기득권 세력이라는 선동은 모두 오랜 세월에 걸쳐 조선·중앙·동아일보 지면과 3대 방송 화면에 등장했다. ‘텔레비전을 통해 폭력에 자주 노출되면 폭력적이 된다’는 언론학의 ‘배양이론’이 고스란히 관철된 셈이다.

 

한국 언론은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석한 농민, 노동자, 청년학생들이 왜 집회를 하고 시위를 했는지조차 온전히 보도하지 않았다. 오직 집회와 시위의 폭력성만 집중 조명했다. 그 ‘폭력’으로 숨진 경찰은 없고, 정작 농민이 죽었는데도 그랬다.

 

차분히 다음을 짚어보자. “농민이 행복한 새누리당 진심/ 쌀값 인상 17만원을 21만원대로/ 기호1/ 준비된 여성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선거 당시 거리 펼침막에 새겨진 공약이다. 현재 쌀값은 어느 정도인가. 17만원은커녕 15만원 안팎으로 떨어졌다. 묻고 싶다. 농민은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더구나 신문도 방송도 농민들의 정당한 항의를 실어주지 않을 때 농민은 어떻게 해야 옳은가.

 

다시 짚어보자. “해고요건 강화.” 대통령에 뽑아달라던 박근혜의 노동공약이다. 일방적 정리해고를 방지하겠다던 그가 대통령이 되어 정리해고에 더해 ‘일반해고’까지 가능케 하는 정책을 언죽번죽 ‘노동개혁’이니 ‘민생 살리기’로 생떼 쓴다면, 노동자들은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더구나 신문도 방송도 노동자들의 정당한 항의를 여론화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옳은가.

바로 그래서다. 권력은 퉁기고 언론이 모르쇠하기에 민중총궐기 집회를 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권력은 물론, 3대 신문과 3대 방송 죄다 민중의 요구를 외면하고 폭력을 부각했다. 결과는 참담하다. 집회를 연 노동자 대표 한상균은 감옥에 있다. 농민에 헌신해온 백남기는 타살됐다. 과연 이 나라가 민주공화국인가?

 

솔직히 청와대는 물론, 김진태 따위의 ‘국회의원’, 전경련의 앞잡이들, 우쭐대는 ‘기레기’ 상층부들이 민중총궐기에 붉은 색깔을 칠하거나 백남기 사인을 두고 ‘빨간 우비’를 들먹이는 작태는 이해할 수도 있다. 저들 잇속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의 통찰에 따르면, 악마화에 나선 사람들의 내면이 바로 ‘악마’다. 농민을 집회에 함께 참석한 사람이 죽였다는 고발은 자신이 제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도 해왔다는 고백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가, 저 자신도 민중의 한 사람이면서 고 백남기를 조롱하거나 민중총궐기 참여자들을 악마화한 말과 글을 쏟아내는 모습은. 아무래도 서글플 수밖에 없다. 정색하고 묻는 까닭이다. 누가 민중을 악마로 만드는가.

 

손석춘 |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Posted by 미디어로그 칸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