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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보기] 국민 겁주는 권력- 돈 키호테가 되어라

올 여름 이후 한국 법원이 내 놓은 사법적 판단 중 몇 가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판단의 대상이 된 사건들은 애초에 문제가 되었을 때, 이를테면 검찰이 기소하였을 때는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시간이 지난 뒤 막상 법원의 판단이 내려졌을 때는 단신처럼 간단히 처리되어 넘어갔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사건 자체에 못지 않게 중요하였으므로, 그 판단이 갖는 사회적 의미에 대해 충분히 음미되었어야 하는 사건들이었다. 

이 사건들은 과거의 독재 체제였다면 이른바 '시국 사건'이라는 범주에 포함시켰어야 할 만한 것들이다. 형식적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이 말도 거의 사라졌는데, 이 말에 해당하는 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7월27일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무죄
교육과학기술부는 김상곤에 대해, 시국 선언을 한 교사들에 대해 징계 의결을 유보하여 직무 유기의 죄를 저질렀다며 고발하였으나, 수원지법 형사11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9월16일 박원순 변호사 승소
국가정보원은 국정원의 시민 단체 사찰 의혹을 제기한 박원순에 대해 '국가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2억원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으나,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는 원고(국정원) 패소 판결을 내렸다. 

 8월10일 김동일 나주세무서 직원 항소심 무죄
국세청은 한상률 전 국세청장을 비판하는 글을 국세청 내부통신망에 올린 김동일을 파면하고 허위 사실을 통해 명예를 훼손한 혐의으로 고발하였으며, 1심에서는 벌금형이 나왔으나, 광주지법 형사6부는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하였다. 

 10월1일 백원우 의원 항소심 무죄
검찰은 노무현의 장례식에서 이명박을 향해 고함을 친 백원우에 대해 '장례식 방해 혐의'로 기소하였으며, 1심에서 벌금형이 나왔으나 서울중앙지법 형사5부는 무죄를 선고하였다.

각각의 사건에서 법원이 내린 판단의 논리와 근거들은 매우 흥미롭지만, 여기서는 중심 이슈가 아니므로 생략한다. 

법원의 판단은 아니지만, 검찰이 고발 사건의 혐의를 각하한 다음과 같은 경우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9월27일 김용옥 무혐의 각하
라이트코리아 등 보수 단체들은 정부합동조사단의 천안함 조사 결과를 비난한 김용옥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으나,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는 범죄 구성 요건을 찾지 못했다며 각하했다.

또 아주 최근의 것으로는 G20 홍보 포스터에 쥐를 그려 넣은 박모씨에 대해 검찰이 구속 영장을 신청했으나 서울중앙지법이 기각한 것도 포함된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9년 4월에 내려진 '미네르바'에 대한 무죄 판결, 2010년 1월에 나온 <PD 수첩> 제작진에 대한 무죄 판결 등도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러한 사건들은 대개 한 측(검찰, 국정원, 보수 단체)이 시사적인 일과 관련하여 다른 측(피고)에게 무리한 법적 처벌을 가하려다 법원에 의해 제지당한 모양을 갖고 있다. 그 대상이 되는 행위는 그저 고함을 친 것(백원우)에서부터 자기 생각을 이야기한 것(김용옥, 김동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심지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김상곤)도 처벌 대상이 됐다. 

이처럼 이 사건들의 양상은 다양하지만,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정권에 불편하거나 불리하거나 불쾌하다는 점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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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국민 없는 국가란 존재할 수 없지만, 그렇게 성립된 국가는 국민 개인에 대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자원의 배분 능력으로 보든 물리력으로 보든, 국가와 국민 개인의 힘은 비교할 수가 없다. 

이렇게 완벽하게 불평등한 권력 구조는 한 측(권력)이 다른 측(국민)의 입에 마음대로 재갈을 물릴 수 있는 배경이 된다. 비록 헌법과 각종 법률이 이를 규제하고 있어도 그 유혹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법률 시스템을 반대 목소리를 억누르는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속성을 지닌 권력이라면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위 사건들에서 재판부가 무죄 판결이나 피고 승소 판결을 내린 것,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 등은 모두 애초에 법을 무리하게 동원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무리한 동원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은 1) 민주 국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삼고 있으며, 2) 결국 법원에 의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원고 대한민국' 소송은 그 출발부터 비웃음거리였으며, 격에 맞지 않는 '쥐벽서' 처리는 검찰이 진정으로 염려하고 보호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의심케 하였다. 심지어 김용옥의 경우에서 보수 단체는 검찰에서조차 혐의를 인정하기 어려운 내용을 들고 나왔다. 

고발하고 고소하는 측들은 이러한 사건이 결국 무죄나 무혐의로 결말이 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최종적인 판단이 어떻게 나는가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법원의 판결이 어떻게 나오든, 일단 문제를 삼는 시점에서 의도했던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의 목소리를 억누르기 위해서 시민을 반드시 감옥에 보내야 할 필요는 없다. 무죄 판결이 날 때 나더라도 일단 건을 만들고(입건), 체포하고, 조사하고, 수사하고, 경찰서 검찰청에 오라가라 하는 것으로 이미 목적은 8할 이상 달성된다. 그 목적이 비판의 목소리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라면 말이다. 이렇게 국가 권력의 개입에 의해 '위험하고 더럽고 어려운' 3D 상황에 처하게 되면, 누구나 앞으로 민주적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른바 위축 효과(chilling effect)를 거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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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축 효과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두 갈래로 진행되어 왔다. 하나는 언론 및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개개의 인간 사이(특히 커플)에서 나타나는 대인 관계의 측면이다.

먼저 개인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위축 효과 양상을 보자.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축 효과는 이 구도의 확장판으로 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한 팀의 부부(혹은 연인)가 있다고 치자. 두 사람의 권력 관계는, 불행히도 많은 현실에서 그렇듯 평등하지 않다. 한 쪽이 더 주도적이고 결정권을 많이 쥐며 물리력(즉 완력)에 있어서도 우월하다. 

부부든 연인이든 서로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할텐데, 이런 구조을 인식하고 있는 약한 측은 자신의 불만을 상대방에게 표현하기를 꺼리게 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함으로써 갈등이 벌어지고 관계 자체가 위험해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자는 사사건건 약자를 억누르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약자가 일단 이러한 인식과 태도를 갖게 되면, 제 스스로 알아서 자기 입에 재갈을 채우기 때문이다. 위축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개인 간의 관계에서 위축 효과를 구성하는 요소는 세 가지이다. 한 측이 문제가 있는 행동이나 태도를 지속적으로 보이지만(문제 행동), 다른 측은 이를 거론하기를 꺼리는데(표현 억제), 그 이유는 갈등을 촉발해 관계 자체를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갈등 회피).

이 같은 위축 효과를 낳는 커플 안의 권력 차이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지만, 특히 위축 효과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를 짚을 수 있다. 

하나는 처벌 능력(폭력, 물리적/정신적 공격)의 차이이고, 다른 하나는 관계에 대한 종속성의 차이이다. 종속성이란 거꾸로 말하면 독립성이 없다는 말이다. 두 사람 중에서 A는 "싫으면 그만 둬. 헤어지면 되지" 하고, B는 "제발 함께 살자. 날 버리지 말아 줘" 한다면, 관계의 주도권은 A에게 가게 되고, B는 할 말을 못하고 살게 된다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사귀는 상대방의 주변에 이성이 많을수록(상대방이 대안의 가능성을 많이 가질수록) 자신의 불만을 표현하지 않아 위축 효과가 커진다고 한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은 권력의 차이와 이로 인한 위기 가능성이 약자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서로가 가진 힘의 차이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이를테면 남편이(혹은 아내가) 왕주먹인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솜주먹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약자가 이러한 힘의 차이를 실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한, 위축 효과는 나타나게 된다. 

대인 관계에서 위축 효과를 오래 연구해 온 Cloven과 Roloff는 "상대방의 잠재적 행동에 대한 인식이 위축 효과를 낳는다"라고 말한다(강조는 원필자들). Tedeshi 등은 "억압적 행동을 하겠다는 위협이 실제로 복종을 이끌어 내는가의 여부는 상대방이 위협의 진실성과 상대방의 억압 능력을 어느 정도로 인식하는가에 달려 있다"라고 주장한다(강조는 원필자들).

쉽게 말해서, 실제 억압 행동이나 처벌을 하지 않더라도, 처벌할 능력과 의지가 있다고 믿게 하는 것만으로도 위축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축 효과는 실질적 힘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과 사고방식의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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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간의 관계를 넘어서, 법에 보장된 언론이나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두 번째 의미의 위축 효과는 주로 발언자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언론이나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많지 않은 서구에서 이러한 시도는 주로 사적 영역(이를테면 기업)이 명예훼손으로 걸고 넘어지는 경우로 대표되어 왔다. 

이 점은 정부 기관과 같은 공공 조직은 대중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존재이므로 이에 대한 명예훼손을 인정하지 않는 서구 사회의 법 전통과도 관련이 있다. 

물론 정부가 위축 효과를 유발하러 나선 사례가 아주 없지는 않다. 이를 테면 1970년대 닉슨 행정부가 텔레비전 뉴스를 통제하러 나선 결과 상당한 위축 효과가 발생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Lashner). 

진보적 월간지 <더 프로그레시브>가 1979년에, 이미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수소폭탄 관련 기사를 내었을 때, 미국 정부가 원자력법 위반으로 배포 가처분 소송을 제기한 것도 한 사례다. 소송이 진행되면서 정부는 소를 취하하고 말았는데, 승소 가능성이 없는데다가, 법원에서 원자력법을 위헌으로 판단할 가능성마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위축 효과를 낳는다. 징벌적 배상 제도가 있는 법률 체계에서는 소송에 걸린 금액이 천문학적이고, 소송 비용 역시 엄청나기 때문이다. 

일단 소송에 휘말리게 되면 최종 승소 여부와는 상관없이 큰 부담을 져야 하고, 이러한 재정 부담은 언론사 자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더 프로그레시브>는 나중에 정부가 알아서 소를 취하하는 수소폭탄 소송을 진행하면서 1년 수익의 3분의 1을 소송 비용으로 써야만 했다. 

이처럼 천문학적 금액의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위축 효과를 유발하는 전략은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를 막는 수단으로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되어 왔다. 

미국에서 명예훼손 소송이 제기되었을 때, 이를 방어하기 위해 드는 평균 소송 비용은 1980년대 중반에는 20만 달러였으며, 현재는 55만 달러(6억2천만원)에 이른다. 물론 패소했을 때 지불해야 하는 돈은 수백만 달러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언론은 민감한 정보를 보도할 때 심사숙고를 거듭해야 한다. 투철한 사명감이 있지 않은 언론이라면 구태여 긁어 부스럼(이라기보다 긁어 치명상)을 내기보다 그냥 넘어가는 편을 선택할 것이다. 소송을 제기하는 자체가 언론과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강력한 위축 효과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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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언론이나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방식으로는 1) 이처럼 가끔씩 무리한 법 적용이나 무차별적인 소송을 통해 본때를 보여줌으로써 위축 효과를 일으키는 방식과 2) 5공화국 때의 보도지침처럼 일목요연하고 구체적으로 규제 지침을 강제하는 방식이 있다.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보면, 할 말 못할 말을 시시콜콜히 규제하고 표현의 방식까지 일일이 간섭하는 규제 지침 방식이 위축 효과 방식보다 더 뻔뻔하고 억압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표현의 자유를 훨씬 더 억압하는 결과를 낳는 것은 위축 효과 방식이며, 따라서 훨씬 더 심각한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왜 그런가. 

이것은 규제 지침 방식이 강자(국가)가 검열을 행하는 데 비해, 위축 효과 방식은 개개인이 스스로 자신에 대해 검열을 행한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아래 그림을 보자. 




빨간 막대는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정도를 나타낸다. 왼쪽으로 갈수록 용인하기 싫은 비판이나 정보를 나타내며, 오른쪽은 허용해도 괜찮은 비판이나 정보다. 따라서, 규제의 선을 왼쪽에 그을수록 허용하는 비판의 폭이 넓어지며, 오른쪽에 그을수록 규제가 강화된다.

'규제 지침 방식'에서는 정부가 규제선을 확실하게 그려 제시한다(가운데의 검은 실선). 여기까지는 괜찮고, 넘으면 문제를 삼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필요한 처벌이나 소송을 당하지 않으려는 언론은 A 지점을 최대 허용 기준으로 삼게 된다. 

그러나 '위축 효과 방식'에서는 정부가 암묵적으로 중간을 규제선으로 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점선). 다만, 이를 침범한 B의 경우를 강력하게 처벌한다. 

이 경우, 언론들은 정부가 용인하는 규제 폭이 어느 지점인지 모르므로 스스로 내용을 저울질하는 자기 검열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결과 그려지는 규제선은 C가 될 수도, D가 될 수도, E가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명확한 규제 지침이 없으므로, 처벌을 회피하려는 언론과 개인은 필요 이상으로 자기 검열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위축 효과는 개개인이 국가의 간섭과 처벌을 받지 않고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 있는 정도가 어디까지인지를 모호하게 하는 측면이 있으며, 그 결과 '허용할 수 있는 정도의 표현' 조차도 꺼리게 되는 자기 검열을 초래한다. 명시적 규제가 아닌데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양상으로 보면 훨씬 심각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이 점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정부나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려는 측에서 보면 훨씬 유리한 결과다. 전체적으로 비판의 양을 줄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위축 효과가 갖는 파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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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축 효과의 결과는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소통의 차단이다. 

할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위축 효과이므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면 의미 있는 소통은 마비된다. 위축 효과를 일으키는 법 집행을 계속하면서 소통을 말하는 측이 있다면 새빨간 거짓말장이라고 보아도 된다. 

한 발 더 나아가, 위축 효과와 이로 인한 소통 차단은 또 어떤 결과를 낳는가. 이 부분 역시 대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위축 효과의 결과에 대한 연구를 차용해 생각해볼 수 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남편의 술주정 습관이나 아내의 도박벽과 같은 문제에 대해, 상대방(약자 측)이 거론조차 꺼리게 됨으로써 이러한 문제가 표면화되고 해결될 가능성은 없어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화한다. 

국가의 정책이 잘못되어 많은 국민이 걱정하고 있더라도, 위축 효과가 나타나게 되면 비판의 목소리는 스스로 잦아들게 되며, 잘못된 정책이 올바른 방향으로 수정될 가능성은 없어진다. 이는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 상대에 대한 실망이 강화된다. 
말은 못하지만 나쁜 놈인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게다가 힘과 권력으로 윽박질러 말까지 못하게 되니 아무리 배우자라도 상대방에 대한 실망이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좋은 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의 한국 집 이웃 중 한 분은 평생 남편에게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아뭇소리 못하고 살았는데, 남편이 죽은 뒤 장례식장에서 친한 친구분들로부터 '표정 관리 좀 하라'는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국가 지도자나 정부는 잘못된 정책을 택할 수도 있다. 실수는 개인이든 조직이든 누구나 할 수 있다.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대가 커지고 문제가 드러나면 이를 즉시 수정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오히려 점수를 더 딸 수도 있다. 그러나 위축 효과만을 꾀하여 비판과 반대 목소리를 막고 밀고 나가면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실망은 극단화된다. 이를테면 '떡을 돌린다'의 정서가 상징하는 바라 하겠다.

셋째, 권력 불평등 관계가 나선형의 형식으로 강화된다. 
소통이 막힌 구조에서 권력의 불균형 상태는 수정될 여지가 없다. 강자는 할 말 다 하고 할 일 다 하고 살지만, 약자는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하며 살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불평등 관계는 더욱 악화하며, 둘 중 누군가가 관계를 해소하거나 자연스레 관계가 해소될 때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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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위축 효과가 활용하는 지렛대는 '표현하고자 하는 자'에게 견디기 어려운 비용을 물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금전적 비용뿐 아니라 시간과 정서, 명예의 비용이 모두 포함된다. 이러한 비용을 덧씌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입 닫고 사는 게 속편하다는 생각을 널리 퍼뜨리는 것, 이것이야 말로 위축 효과가 노리는 바다. 

거꾸로 말하자면, 입 닫고 사는 게 속편한 게 아니라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삶의 질을 더욱 떨어뜨린다는 각성이 태동하는 순간, 위축 효과의 파괴력은 공중분해되어 버리고 만다. 위축시키려 해도 위축되지가 않는 것이다. 

2008년의 촛불 시위 때 '닭장차 투어'는 가두 시위의 구도를 혁명적으로 뒤바꾼 개념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의 가두 시위는 순식간에 도로를 점거하여 시위하는 치고 빠지는 방식의 '가투'나 수많은 사람이 집회 형식으로 거리에 모여 시위하는 대중 집회 방식이었다. 둘 모두 표현과 집회, 시위의 자유를 행사하면서도 체포되는 데 대한 큰 부담을 안고 있었으며, 이러한 부담을 '치고 빠지기'나 '다중의 힘'으로 극복하는 형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촛불 시위 때 사람들은 경찰이 낚아채 가려 하자 "허허, 가자면 가야지 뭐"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제 발로 먼저 버스로 걸어 들어갔다. 이것은 권력이 덧씌우고자 하는 부담이 더 이상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으며, 국가의 무리한 법 집행으로 겪게 될 3D 상황이 '할 말 해야 하는 시민'으로서 당당히 감수할 수 있는 것이라는 각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위축 효과는 닭장차 투어 앞에서 완벽하게 무장 해제된다. 2008년 여름 내내 정부는 저항하는 시민들 때문에 큰 곤란을 겪었지만, 생각건대 그 기나긴 여름 중에서도 가장 간담이 서늘했던 순간은 바로 이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개인의 성격에 따라, 아무리 규제를 하더라도 씨알도 안 먹히고 제 할 말 다 하고 사는 돈 키호테 성향의 사람도 있다. ('돈 키호테 스타일'은 정치학자 Noelle Neumann이 '침묵의 나선형' 이론을 제시하면서, 보통 사람들은 남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할까봐 소수 의견을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 다 하고 개기면서 사는 '하드 코어들'이라면서 그 예로 쓴 표현이다.) 이러한 성향 앞에서도 위축 효과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중요한 점은 위축 효과가 불필요한 부담을 지움으로써 민주 국가의 시민이 누려야 할 표현의 자유나 정당한 비판을 억누르려 한다는 점을 깨닫는 것, 그리고 이러한 위축 효과는 결국 우리들의 인식(즉 두려워함)에 기생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축 효과는 무엇보다 그 피해자의 마음 속에서부터 깨져 나가야 한다. 돈 키호테 한 사람이 개긴다면 위축 효과를 노리는 측은 무리한 법 집행을 계속할 수 있겠지만, 사회에 돈 키호테가 넘친다면 이런 방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당한 권리에 굴레를 씌우고 자기 검열을 유도하는 세상에서 민주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견인불발(堅忍不拔)하는 '인빅터스의 마인드'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