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추론에 떠밀린 비판 벗어나야
정일권 |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jeongik@kw.ac.kr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겠다는 여당 국회의원들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20일 국가정보원이 회의록 발췌본 열람을 허용하고, 급기야 24일에는 2급 비밀문서로 분류됐던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일반문서로 재분류해 공개한 것은 대단히 잘못된 행위다.
경향신문은 회의록 공개의 문제점을 비정치인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다양한 차원에서 지적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우선 이번 회의록 공개가 국정원의 대선 개입 국정조사 공방 중에 불거진 점을 지적해 독자들이 두 사건을 관계지어 생각하게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국제외교 무대에서 신뢰 추락과 남북관계 개선의 장애와 같은 손실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제시했다는 점 역시 평가받을 만하다.
외교 관행과 관련해 비밀과 신의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북한 외의 다른 국가들과의 회담이나 협상이 어려움을 겪게 되어 당장의 정치적 이익추구가 장기적으로는 국가적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은 타당한 지적이다.
그리고 회의록 공개를 통해 지금의 정치적 논란이 일단락되기 힘들다고 예상했는데, 이는 현재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전문이 공개됐음에도 불구하고 NLL 포기 발언의 진위와 함께 협상 과정에서 나온 전략적 발언과 행동 자체의 해석에 있어 여전히 논란이 가시지 않고 오히려 논란이 증폭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비록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이 기밀사항인 정상 간 대화를 공개한 것은 청와대 지시나 승인, 적어도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청와대와의 사전교감 가능성에 대한 합리적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점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 다른 차원에서 기밀보호의 원칙을 어긴 점과 근거가 미약한 추론을 바탕으로 감정적이고 저속한 용어로 국정원과 여당을 비난한 점은 아쉽다. 24일에는 노무현 정부의 박선원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과의 인터뷰를 통해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언내용 일부를 인용해 NLL 포기 발언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정상회담 내용과 관련해서는 정상들 혹은 이를 위임받은 공무원이 기자회견 형식 등을 통해 언론에 일부를 설명하며 공개하기는 하지만 대화록을 공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공개된 내용 외는 모두 비밀로 보는 것이 옳다.
박선원 전 비서관이 전한 내용을 회담 당사국이 사전에 공개하기로 약속한 내용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기밀누설 행위로 봐야 한다.
국정원의 회의록 공개가 문제가 된 바로 그 이유로 이 내용도 공개되어서는 안된다. 공개 내용을 기사화하여 결과적으로 언론이 기밀공개를 도운 셈이다. 어떤 의도에서건 고인이 된 전 대통령의 정상회담 발언에 대한 평가를 내리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이다.
노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NLL을 포기했다고 주장하는 측도 문제지만 NLL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 위해 대화 내용의 일부를 공개하는 것도 위법성 여부를 떠나 옳지 않다. 공개되지 말아야 할 내용에 대한 주장들을 기사화함으로써 정치적 의도를 지닌 세력들 간의 정쟁(政爭)에 경향신문이 이용당한 셈이다.
24일에는 새누리당 내부의 회의록 공개에 대한 비판 배경을 NLL 문제의 이슈화에 성공해 국정원 정치 개입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여론을 덮겠다는 목적을 달성해 치고 빠지기 술수를 쓰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25일에는 정상회담 회의록의 일반 공개를 보류하기로 결정한 것은 새누리당의 이중플레이라고 규정하며 청와대와 국정원과 여당이 한통속이 돼 움직인다는 평가를 피하려는 속셈이라고 설명했다.
26일 기사에서는 남재준 국정원장이 ‘정치군인’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했다.
조직의 명예와 보수주의적 가치를 유달리 중시해왔던 남 원장의 성향을 고려할 때 정치적 이익에 앞서 개인적 성향이 이런 행동의 원인이었다는 주장을 합리적으로 배제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위에 소개하고 있는 내용은 합리적 설명과 해설보다는 기자의 주관적인 추론으로 봐야 한다.
기자는 현실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하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나름의 논리를 세워 추론해볼 수는 있지만 그러한 추론이 기사화되면 독자는 더 이상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정치를 술수와 전략으로만 바라볼 때, 국민은 정치행위와 정치인들에 대한 관심을 거둬들이게 된다. 정치인과 정치행위를 비판하더라도 합리적인 기준에 따른 이성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비판이어야 한다. 감정과 추론에 떠밀린 비판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사 내용의 진실성에 책임을 지는 기자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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