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산의 일각. 일각(一角)은 그야말로 미량의 사실일 뿐이다. 그런 일각은 그 밑에 거대한 몸뚱이를 숨기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일각만을 볼 뿐 빙산 덩어리는 좀체 경험하지 못한다. 빙산 덩어리는 충격과 공포를 가져온다. 평소 경험하지 못하던 거대한 힘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남양유업 사태를 계기로 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의 관계성을 설명하는 갑과 을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남양유업의 한 일각은 갑과 을의 관계성이라는 거대한 빙산 덩어리를 드러내주었다.
경향신문은 지난 5월 초부터 ‘갑의 횡포, 을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갑을 관계로 표현되는 우리 사회의 위계적 관계성을 심층보도하고 있다. ‘여성 일자리’와 더불어 경향신문이 최근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사회적 의제들이다. 둘 다 시의적절하고 사회적 의의도 높은 주제들이다.
경향신문은 다양한 각도에서 갑을 관계를 다루고 있다. 대강 살펴보면 99% 중소기업과 1% 대기업 간의 비합리적인 거래관행에서부터 편의점, 대리점 등 각종 을의 한숨소리, 최근에는 방송사와 외주사, 이통사와 음악인 간의 문제 등도 다룬다. 각각의 사례들을 충분하게 제시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갑을 관계로 점철되어 있는지 고발하는 듯하다. 아쉬운 것은 사례가 독자의 이해를 쉽게 하는 데는 기여하지만 사태의 중심 논리는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언론은 갑을 관계를 ‘권력작동의 구조’로 파악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에서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구조를 예리하게 드러내야 한다. 이는 급변하는 현대사회를 정의하는 것이 신문의 또 다른 역할임을 뜻한다. 경향신문이 몇 달 전 위험사회론에 입각해 ‘위험의 외주화’를 진단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갑을 관계라는 권력작동의 구조는 우리 사회가 현대판 부족사회로 전환해가고 있음을 드러내 보인다. 부족사회란 중세봉건 사회의 그것처럼 혈통을 중심으로 권력관계가 짜여지는 사회를 뜻한다. 재벌을 중심으로 정치 및 고위 정부관료 간의 친족화는 새로운 부족화, ‘갑의 혈통화’ 과정이다. 물론 현대판 부족 개념이 순수하게 혈통적으로만 전개되지는 않는다. 실질적 혈통이 결여된 일반인은 진성 갑의 경제영토에 복속됨으로써 ‘유사 갑’이 된다. 자신이 소속된(취직해 있는) 기업의 사회 내 위상과 경제적 권력이 곧 그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번 남양유업 사건은 정확하게 이 같은 관계를 보여준다. 남양유업 영업사원은 그가 단지 남양유업이라는 기업에 몸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갑이 된다. 이 같은 구조에서 대리점은 당연히 을이 된다. 이렇게 이 사회의 진짜 갑인 권력 소유자와 그 범주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은 광범위한 ‘갑의 혈족’을 구성한 채 경제적 약자와 갑을 관계를 맺는다.
이 같은 해석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일찍이 친족의 구조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교환과 호혜성은 친족의 구조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다. 각기 다른 혈족과 혈족은 결혼이라는 교환의 호혜성을 통해 친족으로 구조화된다. 동일 혈족 내 교환(근친상간)을 금지하는 것은 개별 혈족들이 무사히 생존함은 물론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한 전략이다.
그러나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는 인간 본연의 상호작용 구조마저 깨뜨리고 있다. 동일 혈통 내 교환(대기업의 자회사 일감 몰아주기)이 공공연히 벌어지는가하면 호혜성은 밀어내기와 같은 일방향으로 변질되고 있다. 갑을 관계는 우리들 삶에 거대한 분리의 장벽이 가로지르고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당연히 갑을 관계는 무척이나 배타적이고 착취적이다.
이러한 구조는 항구적인 국가감시와 모든 관계적 활동을 법과 규정, 정관 등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법을 통해 보장, 강화된다. 비정규직법이 을을 보호하기보다 옥죄는 것으로 귀결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 ‘법의 감옥’이라고도 한다. 최근 모든 영역에서 개인정보 활용에 대한 동의를 받는 것 역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보다 잠재적인 분쟁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작동될 뿐이다. 갑이 제시하는 조건에 동의하지 않고는 경제활동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는 난센스가 현실화되고 있다.
이 같은 무한경쟁하에서 을은 과거처럼 집단적 저항을 이뤄내기 힘들다. 무한경쟁 체제에 대한 광범위한 동의와 그를 지지하는 법이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에서 요구되는 덕목은 성찰이다. 언론은 특히 이 같은 성찰적 담론 형성에 앞장서야 한다. 경향신문의 ‘갑의 횡포, 을의 눈물’ 기획이 이 점에 좀 더 천착하기를 기대한다.
임종수 | 세종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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