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 공식 방미 순방길을 돕던 인턴 여직원을 성추행한 후 경찰 조사를 피해 급거 귀국했다. 남북긴장관계 국면에서 첫 여성 대통령을 수행하던 대통령의 ‘입’이 힘없는 여성 인턴 직원을 성추행한 것은 톱기사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대통령의 최초 인사이지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막말’을 서슴지 않던 그의 이번 행각은 막장 드라마보다 더 ‘막장’스럽다.
이 사건에 대한 경향신문의 보도는 어땠을까? 지난 1주일 동안 경향신문이 이 사건을 바라봤던 주요 프레임을 시계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충격 프레임이다. 비윤리나 비도덕성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 데 따른 범국가적 충격을 일컫는다. 내국인은 물론 해외 동포들의 반응을 포함해 범한민족은 어이없는 ‘멘붕’을 경험했다. 이제 막 출범한 권력기관의 실세가 국가의 중차대한 공식방문 와중에 힘없는 젊은 여성을 상대로 벌인 비상식적이고 엽기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둘째, 거짓말 프레임이다. 사건 전말에 대한 윤창중의 해명이 점차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거짓말 프레임은 애초의 사건만큼이나 중요한 이슈가 됐다. 이 프레임은 인턴 여성에 대한 성추행 과정의 진실은 물론 청와대 관계자 및 대통령의 인지, 윤창중이 한국으로 급거 귀국하게 된 경위, 미 대사관과 주미 문화원의 사건 무마, 은폐의혹 등으로 이어진다. 이로써 이 사건은 개인(물론 사건 당시 윤창중이 국가 고위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이미 이 사건은 공적이었다)의 문제에서 조직, 정부, 국가의 문제로 더욱 견고하게 재설정된다.
셋째, 청와대 및 국가기관의 미숙한 위기대응 프레임이다. 청와대의 경우, 사안의 중대함과 어울리지 않는 홍보수석과 비서실장의 사과로 이어지는 안이한 처리방식이 먼저 도마에 올랐다. 사과의 주체인 대통령이 오히려 사과를 받는 사과문 내용은 국민들을 아연실색하게 하는 대목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건이 발생한 지 한참이 지난 13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자리를 ‘빌려서’ 사과했을 뿐이다. 미 대사관이나 문화원 등에서의 위기대응력은 한 술 더 떠 2차 성추행을 방조한 혐의까지 받는다.
경향신문의 이 같은 프레임들은 이 사건의 성격이나 진행과정을 두고 볼 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사건이 주는 충격과 그것을 무마하려는 당사자들의 거짓말 혹은 자기합리화, 그로부터 파생되는 미숙한 뒤처리는 여느 대형사고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프레임들이다.
따라서 경향신문이 적극적으로 발굴해내는 독자적인 프레임이 아쉽다. 가령 개인-국가 범죄 해결 프레임이 있을 수 있다. 애초에 미국 경찰에서 정의했던 경범죄가 중범죄로 바뀔 법리적 가능성, 윤창중의 출국 문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윤창중의 출국 문제에는 자국민 보호의 딜레마도 있을 수 있다. 수행원의 야간 단독행동 금지 매뉴얼(외교통상부의 대통령 해외방문행사 준비지침) 발굴도 눈에 띈다. 통상적인 외교 수행원들의 수행관행 탐사보도도 좋을 것이다. 이번 윤창중 사례에서 보듯이 그들이 대통령을 수행하면서 현지에서 활동하는 사적, 공적 수행관행을 밀도있게 살펴보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저널리즘적 상상력’이다. 소설의 상상력이 아니라 저널리즘적 타당성을 확보하는 상상력 말이다. 직접적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다른 사건 혹은 사실을 문제의 사건과 연결시켜낼 수 있는 힘이 그것이다. 이는 사건만을 뚫어져라 쳐다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저널리즘적 상상력은 독자적인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독자들에게 스토리텔링할 수 있는 기자의 능력이다.
더불어 이 건과 관련은 없지만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다. 지난주 경향신문은 시사인의 주진우 기자에 대한 검찰의 영장신청과 출두, 법원의 기각 과정을 다뤘다. 가장 중요했던 법원의 영장 기각에 대해서는 사회 16면에서 법원이 ‘언론자유’를 언급하면서 영장을 기각했다는 비교적 짧은 5단 기사를 내는 데 그쳤다. 보다 의미있는 처리가 아쉬웠다. 한국 민주주의와 합리적 사고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언론활동의 자유에 대해 가장 앞서 있는 법리는 기자의 악의성이 증명되지 않는 한(그것도 해당 기자가 아닌 악의적이라고 고소한 고발인) 기자의 저널리즘 공표는 언론자유의 영역으로 보호하는 데 있다. 언어로 규정된 진실은 궁극적인 ‘완전한 진실’이라 어느 누구도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 혹은 경제권력을 감시하는 기자의 기사가 설혹 진실의 한 부분만을 다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타당한 근거에 바탕한 것이었다면 보장되어 마땅하다. 그것이 언론이 윤창중을 비판하듯이 문제있는 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저널리즘의 정도이다. 이제 싫은 말 했다고 잡아가는 세상은 넘어서지 않았던가?
임종수 | 세종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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