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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칼럼+옴부즈만

[이봉수 시민편집인 시각]‘분열의 주술’에 걸린 야당과 진보언론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이 때로 혼선의 근원이 되는 건 아이러니다. 파리의 센 강에 걸린 제일 오래된 다리는 ‘새 다리’다. 영화 <퐁뇌프의 연인들> 배경인 퐁뇌프(Pont-Neuf)는 ‘새(Neuf) 다리(Pont)’란 뜻이니까. 낡고 고색창연한 이 다리도 1607년 준공 당시에는 명실상부한 ‘새 다리’였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 엉뚱한 이름이 되고 말았다. 옥스퍼드대학교 38개 칼리지 중에서도 ‘뉴 칼리지(New College)’는 몇 번째로 오래된 칼리지다. ‘새마을’을 뜻하는 신촌(新村)과 ‘새로 설립한 동네’인 신설동(新設洞)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작명이었다. 


‘새’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어하는 심리는 우리나라 정당사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과거에는 신한국당·국민신당처럼 한자말 ‘신(新)’을 즐겨 붙이더니, 어느새 ‘새’라는 순우리말이 대세가 됐다. 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새누리당에 이어 새정치연합이 떴으니 새것에 대한 정치권의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준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여망을 쓸어 담기 위한 작명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당명들은 ‘새천년’민주당이 ‘새십년’의 절반밖에 못 갔을 만큼 대개 단명했다. 새로 지은 당명 말고는 사람도 정강·정책도 바뀐 게 거의 없으니 ‘새’라는 수식어를 계속 붙이기 민망했던 걸까?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는, 영국 보수당이 1912년 이래 같은 이름을 쓸 정도로 정당 이름을 함부로 바꾸지 않는다. 정당 이름을 자주 바꾸는 것은 책임정치를 기피하는 우리 정치의 후진성과 맞물려 있다. 이명박 정권의 실정에 책임져야 할 한나라당도 새누리당으로 ‘신장개업’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추진위원회가 ‘새정치연합’으로 당명을 정하고 발기인대회까지 열었다. 정치에 대한 비판 여론을 업어 지지율도 꽤 높은 편이다. 6월 지방선거는 물론 정계 개편의 큰 변수로 등장했는데도, 언론은 ‘안철수 현상’만 전파할 뿐 그 정치세력의 실체를 드러내는 일에는 매우 소홀하다. 실체가 모호해 기사를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러면 더욱더 언론의 조명이 필요한 거 아닐까? ‘새정치’ 중에 ‘정치’는 늘 있어왔으니 새로운 것이 무엇이고 새 인물이 누구이며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그것만 분석하면 실체가 그려진다.

광장에서 보듯 진정한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국민의 정치개혁 열망이 그토록 간절한데도 열망이 늘 실망으로 귀결되는 데는 언론, 특히 진보언론의 책임도 크다. ‘새정치연합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는 정계 개편 방향, 나아가 한국 민주주의의 장래와 직결된 이슈인데도 진보언론의 의제설정 기능은 미약해 보인다.

보수언론이 적극적으로 퍼뜨리고 있는 야권 분열의 주술, 곧 ‘친노 프레임’과 ‘연대 혐오증’에 진보언론이 말려드는 양상까지 보인다. 민주당에서 국가정보원 특검만 강하게 주장해도 ‘친노’로 분류되고, 문재인 의원이 북 콘서트만 열어도 ‘친노 결집’이다. 보수언론은 ‘김한길(비노)-문재인(친노)-안철수’ 구도의 야권 분열을 은근히 부추기는 한편으로 연대 가능성을 견제해왔다.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1월28일)은 ‘(김한길파는) 지금이 친노와 갈라서고 정통 야당의 깃발과 인감을 유지할 야권 재편의 카드를 던질 때’라고 썼다. 

경향신문의 경우 외부논객이 1년 전쯤 ‘공허한 정치 언어, 새정치’(3월15일)를 비판하고, 내부논객이 올 들어 ‘안철수 신당, 새누리당과 싸워라’(1월24일)라고 촉구하는 등 나름대로 독자적 목소리를 냈다. 새정치추진위원회가 11일 이른바 ‘새정치’의 기본구상을 내놨을 때는 사설로 ‘교과서적 당위론에 머문 안철수의 새정치’를 비판했다.

그러나 주관이 조금 개입되긴 하겠지만 내 모니터링 일지에 따르면, 경향신문은 ‘새정치’에 대한 해설·논평의 건수와 내용, 기획기사 유무 등으로 나타나는 ‘이슈 싸움’의 치열함에서 보수언론뿐 아니라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에 견주어도 좀 약한 듯한 아쉬움을 남겼다.

‘새정치’에 큰 희망을 갖지 못하면서도 그나마 잘해줬으면 하는 이중성이 어정쩡하게 지면에 투영된 게 아닌가 하고 짐작할 따름이다. 진보 쪽에서 보면 정치상황이 불투명하고 우울하지만, 그럴수록 진보언론이 취해야 할 태도는 역시 근본에 물음을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 새정치연합이 내건 ‘중도’가 시대정신인가
‘연대’를 배척하는 것이 새정치에 부합하는가
정치개혁 실효 거두려면 진보언론도 의제설정 기능 높여야


첫째, 새정치연합이 표방하고 있는 ‘중도’는 과연 시대정신인가? 나는 2011년에 ‘안철수 신드롬의 최대 피해자가 언론이 보도하는 박근혜 의원이 아니라 진보정당이 될 것’(한겨레 10월26일)이라고 쓴 적이 있다. 한 사람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되겠지만 그 예측은 현실이 됐다. 정치와 정당을 비판하고 비당파성을 추구하는 것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피해를 보는 건 정치판의 약자요 대중이다.

국민 절대다수가 노동자인데 그들에 기반을 둔 정당이 괴멸되다시피 한 정치지형은 민주주의는 물론 보수를 위해서도 결코 지속 가능한 체제가 아니다. 민주당도 유럽 기준이라면 영락없는 보수당인데 두 보수당 사이에 또 보수당이 생기는 게 우리 정치에 도움이 될까? 지난해 경향에 실린 ‘안철수 신당, 중도좌파 아닌 중도가 타당’이란 제목의 시론(6월29일)은 ‘안철수 신당이 창당된다면 한국 정치 발전에 어쩌면 행운이 따를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나는 불운이 따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유럽의 정당들은 보수당·노동당·사민당 식으로 당명에 이념적 좌표를 확실히 드러낸다. 중도정당도 꽤 있지만 대통령제가 아니라 내각제인 덕분에 연합을 통해 중도의 이념과 정책을 반영할 수 있다. 이념적 깃발도 없이 ‘새정치’ 식으로 얼버무리는 정당은 오래갈 수 없다.

꿈같은 얘기지만 안 의원은 민주당의 보수세력뿐 아니라 새누리당의 합리적 보수세력과 합쳐 진정한 보수정당을 건설하고 민주당의 진보세력은 진보정당들과 합쳐 합리적 보수와 진보로 정치판이 재편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둘째, 안 의원이 ‘정치공학적 선거연대는 없다’며 ‘연대’를 배척하는 것이 과연 ‘새정치’에 부합할까? 연대와 연합은 유럽에서는 정당들의 일상적 정치행위다. 내각책임제에서 연대가 없으면 정부 자체를 구성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우리처럼 정치·종교·학교·재계를 중심으로 기득권동맹이 항상 공고하게 조직돼 있는 사회에서 연대는 대중이 정치만이라도 가끔 장악해 변혁을 꾀하려는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보수언론이 희망버스를 ‘3자 개입’이라며 그토록 매도하는 것은 연대의 필요성에 대한 대중의 각성이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과거 지방선거에 비춰보더라도 야권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2006년에는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분열돼 참패한 반면 2010년에는 야권이 연대해 승리를 거뒀다. 새정치연합은 ‘새누리당 표를 상당히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선거에서는 야권 표를 훨씬 많이 잠식해 아무 소용없는 ‘2등 쟁탈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셋째, 새정치연합에 유입되고 있는 ‘올드보이’들로 과연 ‘새정치’가 가능할까? 박근혜 대통령이 선거공약이던 복지확대와 경제민주화까지 뒤집은 상황에서 민주당에 있을 때도 시장주의를 부르짖다가 공천에서 탈락한 정치인 등을 영입해서 어떤 ‘새정치’를 펴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새정치연합도 이제 기성 정치권에 편입됐으니 비판만으로는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다. 그렇다고 새정치가 꼭 새로운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정치판을 제대로 읽고 합리적이고 타당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도 멋진 새정치다. 많은 이들이 새정치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안 의원에게 자산인 동시에 부채다. 이름과 내용이 일치하는 정치를 보게 되기를 기원한다.


이봉수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