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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리즈=====/김종목의 미디어잡설

회장님의 ‘휠체어 출두’


*이 글은 <주간경향>에 연재중인 [정동늬우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상무는 12일 오전 구급차를 타고 서울서부지검에 도착했다. 구급차에서 내린 그는 바퀴 달린 침대에 앉은 채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한 차림이었다. 눈조차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얼굴을 가렸고, 손도 담요 속에 파묻힌 채였다.(2011년 1월 13일자, 담요싸고 입 다문 태광 비자금 열쇠)
이선애 상무. 태광그룹의 왕상무로 불리는 그는 이호진 회장의 어머니다. 태광그룹? 일반인들에게 재벌인지 모호했을 정도로 존재감이 크지 않았던 이 그룹은 우선 비자금 의혹 사건으로 ‘재벌’에 등극, 그리고 이 상무의 ‘휠체어 출두’로 재벌가임을 다시 입증했다.

검찰은 이날 ‘재벌 오너와 휠체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보내 인증.
앞서 한명숙 전 국무총리 사건과 관련,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도 휠체어 애용.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 국무총리(66)가 8일 오후 처음으로 법정에 나와 무죄를 주장했다.(중략) 변호인단은 “검찰이 입증을 못해 수사기록에도 없는 걸 피고인에게 보여달라는 것이냐”며 거부했다. 왼쪽 안대를 하고 링거를 맞는 초췌한 모습으로 휠체어를 타고 나온 곽 전 사장은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했다.(2010년 3월 9일자, 한 전 총리 무죄 주장)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도 2009년 공판 때 휠체어 타고 출두.
                  ‘휠체어 출두’의 원조격은 한보그룹의 정태수씨.

재판부의 호명을 받은 정태수씨는 오른팔에 링거를 꽂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법정에 들어섰다. 며칠간 수염을 깎지 않아 텁수룩한 모습이었고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다.(1997년 4월 29일자, 한보공판 정씨 부자 법정 상봉)

휠체어에 링거는 필수품. 정씨는 당시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인 상태였다. 그러고 보면 재벌 입장에서 한국은 경제 선봉에서 경제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다 몸과 마음까지 병든 사람들을 오라 가라나 하는, 경제 살리기는 뒷전인 사회. 게다가 때로는 휠체어 때문에 이중삼중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 잔인한 사회. 한국 ‘카지노 대부’ 전낙원씨가 피해자.

문민정부 초기 검찰의 사정 칼날을 피해 3년여간 해외 도피생활을 했던 ‘카지노 대부’ 전낙원씨(69)는 24일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결국 휠체어에 앉은 채로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다.(중략)재판부는 특히 전씨가 정상참작 사유로 내세우고 있는 병세가 근거없는 ‘구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건강진단서 분석을 통해 반박함으로써 검찰의 불구속기소 처분이 다분히 ‘봐주기’였음을 우회적으로 질타했다.(1997년 2월 25일자, 의도적 해외 도피에 괘씸형, 전낙원씨 실형·법정구속 배경)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귀국 임박. 이미 휠체어는 재벌들의 필수 아이템. 언론도 휠체어 없는 재벌 총수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전망하는 기사까지 나온다.
휠체어를 타고 마스크를 쓴 채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일까. 아니면 아예 침대에 누워 링거를 꽂은 중환자 행세일까. 혹시 혼자 걸어나오되 병색이 완연하고 초라한 상노인의 몰골은 아닐까.(2005년 6월 13일자, 김우중 ‘귀국 시나리오’)

귀국 시나리오는 제대로 앞일을 내다봤다.

      왼쪽 _ 1997년 4월 공판에 출석하는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 김정근 기자
             오른쪽 _ 2006년 7월 항소심 공판에 출석하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연합뉴스


김씨가 오른팔에 링거를 꽂은 채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법정으로 들어섰다. 흰색 환자복을 입은 김씨는 그동안 더욱 수척해진 모습이었다.(2006년 5월 31일자, 휠체어 위의 초라한 ‘세계 경영’, 金씨 공판 내내 고개 떨궈…)

몰락한 재벌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최대 재벌 회장님들도 애용.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입국은 ‘안기부 X파일’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해 9월 4일 김포공항에서 일본 도쿄를 경유해 미국으로 출국한 이후 꼭 5개월 만이다. 이 회장은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허리에 복대를 두른 채 휠체어를 타고 귀국했다. (2006년 2월 6일자, 이건희 회장 수사 전망 - 휠체어 귀국…‘에버랜드’가 발목)

휠체어는 우호적·동정적 여론 확보를 위한 연출과 이미지 도구로 자주 쓰였는데, 정몽구 회장의 경우처럼 때로는 판사님들의 심금을 울리며 효과를 발휘하기도.

정 회장은 이날 거동이 불편한 듯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출석했다. 재판부는 정 회장에게 건강상태와 지난 9일 이뤄진 정밀검진 결과를 물었고, 정 회장은 “혈압이 높고 오른쪽 무릎 관절염이 심하다”고 대답했다. 재판부는 이른 시일 내에 보석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2006년 6월 13일자, 정 회장, 비자금 조성 모른다, 보석 여부 조만간 결정)

재벌 회장님들의 휠체어는 국격을 높이는 데도 혁혁한 기여. 관대한 사법부도 국격에 일조.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까지 ‘재벌과 휠체어’의 관계를 집중 분석해 보도.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12일 처벌받을 상황에 놓이면 병을 핑계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는 한국 재벌들의 행태를 비판했다. 대기업 회장들이 법정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뒤 잇달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한국 사회 특유의 풍경을 꼬집어 말한 것이다.(중략) FT는 “한국 법원은 기업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 회사를 계속 경영하도록 하는 것이 국익이라고 믿는 것 같다”며 “점잖게 행동하는 기업인, 모든 시민을 평등하게 다루는 사법제도가 오히려 더 국익에 부합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2007년 9월 13일자, ‘휠체어 타는 한국 재벌 회장들’ -FT, 병 핑계로 위기 모면 행태 비아냥)

<김종목 경향신문 미디어부 기자 jo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