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부 기자가 민주당 대표실 회의를 도청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언론으로서 KBS의 신뢰도는 바닥에 떨어졌다. 취재를 나간 KBS 기자들은 현장에서 ‘도청이나 하지 여기는 왜 왔느냐’는 시민들의 비아냥을 듣고 있다.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대다수 시민들은 KBS의 도청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번 손상된 평판을 회복하기란 쉽지 않다.
서울 여의도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 사무실에서 18일 만난 엄경철 새노조위원장(44)은 “대통령 특보가 사장으로 온 것은 권력이 강제로 내리 누른 것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우리 스스로 신뢰의 위기를 불러온 것이다. 참담하다”고 밝혔다.
엄 위원장은 “KBS 내부에는 (우리 기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대단히 강력한 가족주의가 있다. 이것 때문에 KBS가 자기 혁신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사측이 진실을 밝히고 책임질 것이 있다면 책임지는 것이 신뢰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도청 의혹이 제기된 뒤 KBS 기자들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나.
“어쩌다가 우리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젊은 기자들은 ‘회사 문 닫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한다. 보도라는 게 신뢰와 정확성에 기반을 두는 것 아닌가. 근본이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외부에선 KBS 기자들이 왜 적극적으로 진실 규명을 요구하지 않는지 의아하게 여기고 있다.
“도청 당사자로 지목돼 경찰에 출두했던 장모 기자도 사실 새노조 조합원이다. 사태 초반 새노조가 도청 문제를 제기했더니 ‘조합이 조합원을 보호해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가 들려왔다. KBS 내부의 온정주의, 가족주의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강하게 꺼내면 ‘인정 없다’고 생각하는 정서가 여전히 있다. 그나마 보름 이상 사태가 전개되면서 지난 15일부터 기자들이 사내 게시판에 의견을 밝히기 시작했다. 온정주의의 벽이 깨지는 느낌이 있다.”
-지난 11일 KBS 정치부의 입장 발표가 있었다. 사측이 도청 의혹에 대한 대응을 일선 기자들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어느 간부는 이사회에서 ‘나는 후배들을 믿는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사측이 적극적으로 진상을 조사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사측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데 ‘제3자의 도움이 있었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도청은 아니다’ 등 단서가 많다.
정말 결백하다면 결론은 ‘도청을 하지 않았다’ ‘한나라당에 녹취록을 주지 않았다’는 두 가지여야 한다. 저촉되는 게 하나라도 있으면 용서를 구하고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KBS는 친일 경력의 백선엽 장군을 영웅화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것으로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백선엽 다큐는 사측이 자살골을 넣은 것이다. 친일은 이념의 좌우나 가치관의 차이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친일은 범죄 아닌가. 공영방송은 시민의 것이므로 시민의 요구나 비판에 투명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러나 사측은 (친일 인물을 미화한) 잘못을 사과하지 않는다.”
-‘친일·독재 찬양방송 저지 비상대책위원회’가 18일부터 김인규 사장 퇴진촉구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외부에서 김 사장 퇴진 요구가 터져 나온 것을 어떻게 보나.
“구성원이 자각하고 책임을 묻는 게 수순인데 부끄럽게도 외부에서 먼저 사장 퇴진을 들고 나왔다. 구성원들이 지난 3년간 싸우면서 많이 지쳤다. 만날 집회하고 파업해도 현실은 그대로라는 패배의식이 분명히 있다.
3년 전에는 웬만한 사안에 관해서도 게시판에 글을 쓰고 반대했는데 지금은 개인 글이 거의 없다. 외부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내부 구성원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할 말이 없다.”
-지금 KBS가 시청자들의 신뢰를 되찾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스스로 진실을 밝히는 것밖에 없다. 도청에 연루됐다면 경영진은 용서를 구하고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새노조가 진실을 확인하려고 정치부 기자들을 접촉해봤지만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
KBS 이사회는 사측에 감사를 요청할 권한을 갖고 있다. 내부 감사 기능을 동원해서라도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 이사회가 사측에 감사를 요청하도록 촉구할 계획이다.”
최희진 기자 daisy@kyunghyang.com
'미디어 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편채널 언론시장 황폐화 용납 못해" (0) | 2011.08.24 |
---|---|
김재철 MBC사장 "노사협상에 성실히 임하겠다" (0) | 2011.08.24 |
노종면 "복직은 안됐지만 매일 1만여명에게 뉴스 전달" (0) | 2011.07.06 |
KBS새노조 "청와대 구내방송 그만하라" (0) | 2011.06.08 |
“징계·공권력·공포감 조성 비판보도 봉쇄” (0) | 2011.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