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불편부당하게 요구하기

피리 한 개를 두고 다투는 세 아이가 있다. 첫째 아이는 자신만이 피리를 불 수 있다고 말하고, 그래서 자기가 피리를 갖는 게 좋겠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다른 아이들은 부자이고 장난감이 많지만, 자신만 장난감이 없다며 피리를 요구한다. 셋째 아이는 ‘그 피리를 만든 이가 바로 나’라고 말한다. 만든 사람이 가져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누가 피리를 가져야 할까?


아마르티아 센이 쓴 <정의의 아이디어>란 책에 나오는 우화다. 얘기의 요점은 세 아이의 주장은 각자에게 유리하지만, 이유를 보면 각자 나름 합당하다는 것이다. 세 이유 모두 자의적이지도, 편향적이지도 않다. 센은 이 요점을 밀고 나가 결국 정의란 ‘흠잡을 데 없이 공정한 제도’를 통해 이룩할 수 있다기보다 ‘산만하지만 합당한 주장들을 놓고 이뤄지는 공적 토론’으로 도달할 수 있으리라 주장한다.


내가 소개한 내용은 <정의의 아이디어>가 담고 있는 풍부한 논의를 부당하게 축소한다. 실로 이 책은 어떤 대단한 생각을 접하고 익힐 때 누구나 느낄 만한 뿌듯함을 주는 정도에 멈추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따듯한 마음과 그들도 마땅히 누려야 할 정의에 대한 신념을 갖게 한다. 현대 정치철학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존 롤스 <정의론>의 한계를 돌파해서, 새로운 정의론을 세우는 일이 가능하리라는 기대감마저 제공한다.


센의 책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나오는 ‘불편부당한(impartial) 관찰자’란 용어를 반복해서 인용한다. ‘불편부당함’이란 편파적으로 쏠리지 않고 어떤 당파의 이익을 챙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영어나 한자어 모두 하나의 이념을 긍정하는 식이 아니라 ‘편 들지 않는다’는 식으로 부정의 부정을 통해 의미를 전한다는 데 주의하자.


‘불편부당’의 용례를 영국 언론 BBC에서 찾아볼 수 있다. BBC는 자신이 만드는 모든 뉴스가 적정하게 불편부당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는데, 이는 그 내용이 편향되지 않고, 배제적이지 않고, 협소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소수자의 주장을 비율에 따라 균형 있게 다룬다면서 사실상 축소해서는 안된다. 


BBC는 현명하게도 불편부당성을 공정성과 뚜렷하게 구분한다. BBC가 말하는 공정성이란 타인에 대한 존중, 정직성, 공개성에 기초해서 방송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연 모든 뉴스가 불편부당하고 또한 공정한 나라가 있다면, 그런 나라는 결국 정의롭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기대할 수 있겠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 불편부당하다는 말은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 일단 무엇을 지칭하는지가 모호하다. <정의의 아이디어> 번역본만 보더라도 ‘임파셜리티’는 주로 ‘공평’으로, 때로 ‘불편부당’으로 등장한다. 덧붙여 ‘형평성(equity)’이라 옮기면 좋을 만한 개념이 ‘공평’으로 나와서 혼란을 더한다. 이 때문에 불편부당하고 합당한 이유를 들어 공적으로 토론하는 일이 정의를 이루는 방법이라는 아마르티아 센의 논지를 파악하기 어렵다. 


애초에 불편부당성을 ‘공평성’이라 옮긴 사례를 롤스의 <정의론> 번역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해관계에 따라 편향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구절이나, ‘불편부당한 관찰자’를 암시하는 구절을 옮기면서 모두 ‘공평’이라 하고 영문을 병기했기에 일관성은 있다. 그런데 정작 애덤 스미스의 걸작 <도덕감정론>의 번역본을 보면, ‘임파셜리티’는 대체로 ‘공정’으로, 때로 ‘불편부당함’으로 등장한다. 


나는 무슨 번역의 품질을 트집 잡으려는 게 아니다. 정의롭게 살기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해야 정의로운 것인지 표현하기조차 애매한 우리말 현실이 답답하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한낱 배운 척하기 좋아하는 서생의 자기연민이라고 비웃어도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내로남불’에 분노하면서 유사한 기회를 노리고, ‘성적 괴롭힘’을 증오하면서 희롱수준에 불과하다고 넘어가며, ‘증오발언’을 혐오하면서 증오를 실천하는 우리 현실을 돌아보자. 말과 행위가 얽혀 만드는 혼란이 간단치 않다. 혹시 불편부당함을 실천하지 않는 이유가 불편부당하게 요구할 방법을 몰라서는 아닐까. 그래서 공정한 제도를 만들자고 불공정한 방식으로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롤스나 센의 책을 읽지 않아서가 문제가 아니라, 실은 읽어도 소용없고, 오히려 읽었기에 이 꼴인 건 아닐까.


<이준웅 | 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