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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뉴스

[미디어 세상]상실의 시대

1987년 발표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은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첫사랑과 절친을 잃으며 성장의 시기를 보낸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는 색다른 감성의 유니크한 문체로 당시 우리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감각의 충격을 전해주었습니다. 이 소설은 한국에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민주화투쟁의 승리로 정치적 공정성이 확보되고, 산업화의 가파른 성장으로 절대빈곤의 어려움이 극복되기 시작하던 때, 그 시절 청춘이었던 ‘X세대’들에게는 기존의 관성이 무너지고 새로 찾아야 할 가치를 탐색해야 하는 상황에서 ‘상실’이라는 키워드가 큰 공감을 얻어낸 것이었습니다.


상실의 이야기는 위화의 소설에서도 굽이굽이 펼쳐집니다. 1993년 발간된 <인생(원제 活着)>은 모든 것을 잃은 노인의 연대기를 보여줍니다. 장이머우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그의 소설은 중국의 국어교과서에도 실렸다 합니다. 중국의 근대사에 한 인생이 어떻게 영향을 받고 ‘기구하게’ 흘러가는지를 온갖 시대의 풍파를 거치며 자신의 목숨과 같은 가족들을 모두 잃는 아픔을 겪은 후 홀로 살아남은 주인공 ‘푸구이’ 노인을 통해 절절히 전해줍니다.


우리네에게 집단적 상실에 대한 애달프고 시린 마음은 오래된 가요 ‘단장의 미아리고개’와 KBS의 TV프로그램 ‘이산가족 찾기’라는 전 국민적 이벤트를 통해, 또 명절에 눈물바다를 만들어주던 적십자사 주최의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혈육을 잃어버린 분단의 비극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원죄와 같은 상실감을 마음속 심연에 담게 해주었고, 동류와의 교류 제한은 필수의 결핍을 트라우마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상실에 대한 요즘 사람들의 마음은 다른 결로도 보입니다. 요 근래 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상문화(喪文化)’라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합니다. 노력하더라도 현실에서 나아질 수 없음에 좌절하며 상실감을 느끼는 것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N포 세대’의 맥락과 마찬가지로 기회가 제한되고 미래에 대한 가능성 또한 줄어들었다 느껴 절망감에 빠지게 됩니다. 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밈(meme)으로 ‘소확상(小確喪)’이라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1986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 한스 섬의 오후>에 등장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단어 ‘소확행(小確幸)’의 패러디입니다. ‘사소하고 확실한 좌절’이라는 뜻으로 일상생활에서마저 의미를 갖지 못하며 불행한 삶을 이어가는 어려움을 표현합니다. 애초에 가지지 못한 세대들에게 상실감마저 사치처럼 다가오기에 이들은 “격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에 빠져 무력해진다 자조합니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팬데믹 상황 속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단장의 고통을 전 지구적으로 겪고 있습니다. 현대 인류가 이룬 문명의 발전이 기본적인 생존에 얼마나 취약한지 경험한 이상 상실은 사전 속 단어가 아닌 현실의 문제입니다. 


요행히 생명을 지킨다 해도 ‘관계’를 지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지난 몇 개월간 실업률뿐만 아니라 이혼, 가정폭력 등 가정불화 또한 증가하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삶의 대부분으로 여겨지는 요소들의 점차적인 붕괴는 1997년 외환위기 때 우리나라에서 겪었던 가족해체의 비극을 대다수 국가가 경험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어울릴 수 있는 자유마저 박탈되는 잔인한 시기가 어서 끝나기를 바랍니다. 이 긴 터널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그만큼 소중한 것을 잃지 않도록 주변을 둘러보기를, 고난을 버티게 해줄 지혜가 흔들리는 마음의 연약함을 이기도록 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도합니다.


<송길영 마인드 마이너(Mind M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