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권 |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1월31일 법원은 횡령과 배임을 이유로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하고 피고인을 법정구속했다. 지금까지 같은 혐의로 법정에 섰던 대부분의 재벌 회장들이 무죄 혹은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나온 점을 감안할 때 대단히 예외적인 결과다.
경향신문은 법원의 이번 판결에 대해 독자들의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고 이러한 정보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이 이번 판결의 의의를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좋은 기사들을 실었다.
법원 출석하는 최태원 SK 회장(출처 :경향DB)
1일의 <재판부 “횡령사건 모두 최태원 회장 지시”>라는 기사에서는 최 회장의 구체적인 범죄행위와 이에 대한 최 회장의 해명을 실었다. 독자는 이를 통해 법원에서 쟁점이 되어 온 사안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또한 검찰이 최태원 회장보다 높은 형량을 구형한 최재원 수석부회장이 무죄 판결을 받은 이유를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부당한 방법이었다는 재판부의 설명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쉽게 풀어썼다.
1일의 <법원, 재벌 총수 ‘봐주기’ 관행 버리고 ‘법대로 엄단’으로 전환>이라는 기사에서는 재벌 그룹 총수들에 대한 지금까지의 판결 과정을 나열하고 최근의 변화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에 이어 이번 최태원 회장에 이르기까지 법원이 기업 총수에게 잇따른 실형선고를 한 배경을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정신과 양형기준제라는 제도적 변화와 연결시켜 분석하고 있다. 이런 내용은 독자들이 이 사건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됐다.
그러나 이번 판결을 다룬 기사에서 아쉬운 점도 있다. 법원의 이번 판결은 지금까지 잘못된 판단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됐고 따라서 이번 판결은 법에 따라 정확히 판단한 결과일 뿐 ‘재벌 손보기’로 비춰져서는 안 된다. 1일의 다른 기사에서는 이번 재판을 맡은 이원범 판사를 비리 재벌의 ‘저승사자’라고 표현했다. 또 다른 기사에는 “재계는 ‘폭풍전야’”라는 문구를 제목에 쓰고 있다. 이는 모두 재판부와 재벌이 대결하고 있는 인상을 준다. 이런 표현은 많은 독자들을 ‘이제야 재판부가 재벌을 제대로 응징하는구나’라고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또한 이런 대결구도는 재벌이 우리 경제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을 고려하는 사람들에게는 ‘재벌이 무슨 죄인가?’라는 반발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한다. 핵심은 최태원씨가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처벌받은 것이지 최태원씨가 SK그룹 회장이어서 처벌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권력 앞에서도 당당히 재판관의 의지를 관철시킨 부분에 대한 의의를 찾는 것이 자칫 재벌에 대한 응징으로 비춰지는 면은 없는지 짚어봐야 할 부분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동안 사법부를 포함한 우리사회 전체가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결과를 범죄인의 처벌에 과도하게 고려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는 내용을 기사에 담지 못한 점이 아쉽다.
과거의 판결문을 보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공이 형량을 확정하는데 고려됐다. 그리고 공직자들이 판결을 받을 때는 으레 국가 혹은 국민을 위해 일한 부분이 감형의 이유가 됐다. 이번 최태원 회장의 판결에서도 판사는 대기업 총수로서 피고가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 바를 고려해서 형량을 확정했다고 한다. 과연 이런 논리가 타당한가? 대통령과 공직자들 그리고 기업 총수는 특별히 사회를 위해 기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요구되는 과업 이외의 일을 한 것이 아니다.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운영하다보니, 공직자로서 공무를 집행하다 보니, 기업가로서 사업체를 운영하다 보니 그 결과가 국가 혹은 사회에 득이 된 것뿐이다.
게다가 이들이 저지른 죄는 거의 그들의 지위에서 나오는 권력과 관계된다. 즉 그들은 자신의 지위를 남용한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단순히 자신의 지위에 맞는 행위를 했다는 것만으로 감형을 하는 것이 정당한지 의문이다. 이러한 지위에 이르지 못한 많은 사람들도 자신의 일을 충실히 수행한다. 새벽에 거리를 쓰는 청소원들, 밤늦게 취객을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다 주는 택시 기사들이 모두 자신의 일에 열심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런 일들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크게 불편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들이 자신의 직업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이들이 지은 죄에 대한 처벌을 약화시키는 데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결국 지금까지 재판부와 우리사회가 고위직, 재벌 등 사회적으로 가진 자들에 대한 형량 기준으로 내세운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여도는 사회적 지위에 따른 체계적 불평등일 뿐이다. 사회 전체에 팽배해 있는 불평등을 용인하는 이런 태도에 대한 지적이 더해진 기사를 읽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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