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 |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12월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일 아침 경향신문 1면은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전면에 게시했다. <오늘, 1913년 영국 경마장을 떠올리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는 약 100년 전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며 달리는 말 사이로 뛰어들어 끝내 목숨을 잃었던 에밀리 데이비슨을 이야기했다. 지금 우리 모두가 당연하게 누리는 ‘투표의 권리’가 지난한 투쟁의 역사를 통해 얻어진 소중한 가치임을 새삼 일깨워 준 기사였다. 이어진 2면과 5면 기사 <내가 투표하는 이유>에서도 각계각층 인사들과 시민들의 목소리를 통해 ‘참여’의 의미가 촘촘하게 전달되었다. 마침내 18대 대통령 선거는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며 마감되었다. 어떤 후보를 선택했는가에 있어서는 세대와 지역 간 격차가 두드러지게 나타났지만, 누구를 택했던 간에 각자의 이유와 명분을 열정적으로 표출했던 선거였음은 분명하다.
야성의 참정권을 주장하며 경마장으로 뛰어든 영국의 에밀리 데이비슨 (출처:경향DB)
짧게는 지난 몇 주, 길게는 지난 몇 달 동안의 대통령 선거 보도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진행돼야겠지만, 선거 후반부로 갈수록 각 후보의 유세 활동과 네거티브 공방이 지면을 장악한 것은 특별히 아쉬운 대목이다. 선거일 바로 직전인 17일과 18일 모두 국정원 직원 댓글 의혹 사건에 대한 기사들이 1면을 차지했고(<“국정원 댓글 흔적 없어” 토론회 직후 기습 발표>, <국정원 직원 ID 40개 스마트폰 수사 안 했다>), 3차 후보자 텔레비전 토론회를 단순 중계하거나 전략적으로 평가하는 기사들(<문 “불법 선거사무실 인정하냐” 박 “수사하고 있는 것”>, <화끈해진 1대1 양자토론>)이 다수 게재되었다. 선거일을 앞두고 2012년 선택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유권자들이 고려해야 할 중요한 쟁점 사항들을 다시금 정리할 수 있는 세심한 지면 구성이 필요했으나, 여러 모로 미흡했다.
경향신문은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중요한 정치, 경제, 사회적 현안들을 의제로 설정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3대 의제를 선정해 각 이슈별로 시민 집담회를 개최함으로써 아래로부터 정책적 요구를 수렴했으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함께 후보들의 공약을 구체성, 개혁성, 적합성 측면에서 평가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책 검증을 하고자 했다. 물론 현행 공직선거법이 걸림돌이 된 부분이 크지만, 남북관계, 검찰개혁, 정치개혁, 지방분권, 대입 사교육, 무상보육, 보건의료 등 총 7개 분야에 대한 공약 검증 결과가 이틀 동안 숨 가쁘게 기사화되어 결과적으로 취지를 제대로 못 살렸다는 아쉬움을 낳았다. 선거법 개정 등 구조적인 제도개혁이 선행되어야겠지만, 언론의 정책검증 모델을 새롭게 모색해야 한다는 어려운 숙제도 남았다.
이제 국민의 선택으로 차기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51대 48’이라는 숫자가 암시하듯, 선거 결과에 대한 국민의 정서는 첨예하게 양분되어 있다. 이제 선거를 통해 표출된 세대 간, 지역 간, 계층 간 ‘격차’의 의미를 꼼꼼히 분석하고 그것이 한국사회의 미래에 던지는 함의를 숙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단순히 각 후보의 선거 전략에 대한 평가가 아닌, 다른 세대, 다른 지역, 다른 계층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분석과 평가가 필요하다. 우리 국민들이 현재 어떤 ‘존재의 조건’에 서 있으며 그들의 선택에는 어떤 열망이 내포된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양분된 정서는 통합될 수 없으며 선거를 계기로 깊어진 상처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12월22일자 2면 기사 <“우린 전쟁 얘기 듣고 큰 세대… 진보세력에 대한 불안·회의 들었다”>와 <‘베이비부머’ 50대의 삶>은 주목할 만했다. 물론 일화적인 내용에 그친 감이 없진 않지만, 선거 결과를 가른 50대의 선택을 이해하는 데에 유익했다. 같은 날 4면 기사 <50대의 반란, 문의 정치개혁보다 박의 경제개혁이 절실했다>도 전문가 좌담을 통해 선거 결과와 연동돼 있는 구조적, 전략적 요인들을 심층적으로 점검했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한 보도였다.
이제 깊이 있는 호흡으로 한국 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차분하게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국민대통합이 수사적인 구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한국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려면 먼저 입장이 다른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대화’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저널리즘의 규범과 원칙에 가장 충실한 자세로 각자의 주장과 의견을 충분히 펼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통해 세대 간, 지역 간, 계층 간 격차가 빚어낸 다양한 형태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 중재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대화와 치유의 매개체로서 언론의 묵직한 역할이 절실한 때이다. 새로운 전환기에 서 있는 한국 사회에서 경향신문이 이러한 역할을 묵묵하게 해 나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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